[지금 도착한 책] 연암을 읽는다, 박희병 저, 돌베개

“세상은 점점 요지경이 되어 가고 있다. 사람들은 점점 더 빨라지고 있으며, 빨라지는 그만큼 생각을 점점 더 않게 된다. 생각을 하지 않으니 이 세계에 대해 점점 더 피상적으로 될 수밖에 없다. 많이 안다고 여기지만, 그것은 대개 시시껄렁한 것 아니면 실용적인 지식이며, 삶의 근원과 관련된 앎은 아니다. 문학 작품이나 예술 작품이라는 텍스트를 읽는 일은 한편으로는 즐거운 일이지만 한편으로는 고통스럽다. 왜 고통스러운가. 텍스트 속으로 깊이 들어가기 위해선 ‘생각’, 즉 사유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생 역시 그렇듯이 이 고통의 과정 없이는 우리는 텍스트의 본질을 이해할 수 없다.”   (p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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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책을 읽다가 가끔 발견하는 금광
책을 읽다가 ‘금광을 발견했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연암을 읽는다>에서 바로 그런 느낌을 받았다. 이 책은 시인겸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는 노만수 선배가 자신의 ‘인생의 책’이라며 에이케이스로 보내 준 책이었다. (노만수 선배는 동아시아 3국에서 두루 고전을 공부한 경험을 가지고 있으며 그 경험을 살려 중국과 일본의 양서를 번역하는 틈틈히 자신의 저술 활동을 펼치고 있다. 근래 좋은 평을 받고 있는 <쟁경>이 그의 최근 번역작이다.)

2. 너무 먼 나라 조선
연암은 1737년생이다. 1805년에 작고했으니 두 세기 전의 사람이라고 해도 큰 무리가 없다. 200년이면 물론 긴 세월이긴 하나 ‘고전’이라는 기준으로 생각해 볼 때는 짧은 기간이다. 박지원의 글들은 이 짧은 기간을 이겨내지 못하고  읽을 수 없는 글이 되어버렸다.  (박지원의 패배는 박지원의 탓이 아니다.  박지원의 후배들의 탓이다.) 그 사이 저술과 독서에 활용하는 문자 체계가 완전히 바뀌었다는 것은 오히려 작은 문제다.(온갖 서양 고전들 역시 번역된 글을 통해 읽고 있지 않은가) 더 큰 문제는 18세기 조선의 교양과 현재 한국의 교양이 완전히 다르다는 점이다. 번역된 연암의 말이 농담인지, 분노인지, 논거인지 전혀 구분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우리는 200년 전에 서울 거리를 활보했던 거인의 맨낯을 볼 수 없게 된 것이다. 18세기의 조선은 16세기의 영국(셰익스피어)이나 15세기의 이탈리아(마키아벨리)나 심지어 2000년 전의 로마(오비디우스)보다 오히려 더 멀고 이해할 수 없는 나라가 되어 버렸다.

3. 거인을 읽기 위한 독특한 구성
박희병 교수의 <연암을 읽는다>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독특한 구성방식을 취하고 있다. 번역문 – 주해 – 평설 – 총평으로 이어지는 구성방식은 조선시대 지식계급의 교양을 집단적으로 상실한 우리들에게 박지원이라는 거인의 텍스트를 읽을 수 있게 충실한 길안내를 해준다.

4. 왜 연암을 읽어야 하는가
많은 사람들이 연암을 함께 읽었으면 좋겠다. 너무도 훌륭한 지적 성취와 방법론이 우리에게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이를 적절히 활용하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같은 맥락에서 박희병 교수의 서문의 일부를 소개한다.

‘古’란 무엇인가. 그것은 죽은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일부분이며, 그 점에서 하나의 ‘지속’이다. 우리는 이 지속성 속에서 잃었던 자기 자신을 환기하고, 소중한 자신의 일부를 되찾을 수 있으며, 자신의 오랜 기억과 대면할 수 있다. 그러므로 ‘고’는 진정한 자기회귀의 본질적 계기가 된다. 진정한 자기회귀란 무엇인가. 그것은 자기를 긍정하되 자기에 갇히지 않고, 잃어버린 것을 통해 자기를 재창조해 내는 과정이다. 이 점에서 ‘고’는 한갓 복원이나 찬탄의 대상이 아니라 ‘오래된 미래’를 찾아 나가는 심오한 정신의 어떤 행로다. (중략)
연암을 읽는 것은 무엇인가? 연암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연암 주변을 아무리 빙빙 배회해 봤자 연암의 진면목을 알기는 어렵다. 연암을 알기 위해서는 연암의 마음속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 연암이 무엇을 괴로워했는지, 무엇을 기뻐했는지, 무엇을 슬퍼했는지, 무엇에 분노했는지, 스스로 연암이 되어 느껴보지 않으면 안 된다. 하지만, 연암을 읽는다는 일이, 단지 연암의 시선으로 삶과 자연과 세상을 읽는 데 그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동시에 스스로의 시선, 다시 말해 우리 시대 ‘나’의 시선으로 삶과 자연과 세상을 읽는 일이기도 한 것이다. 그럴 경우, 사유하는 주체이자 심미적 주체로서의 연암은, 또다른 사유의 주체이자 심미적 주체인 ‘나’와 부단히 교섭하면서 대화적 관계를 형성할 수 있다. (후략)

5. 사족
22편의 글 모두가 좋았으나 그중에서 몇 개를 꼽아 본다면 아래 다섯 편이 특히 좋았다.

  • 18세기 조선이, 연암을 통해 도달한 창작/창조 방법론 법고창신의 진면목 – 초정집서문
  • 누이 잃은 슬픔을 절절하게 적은 글 – 큰누님 박씨 묘지명
  • 젊은 날 친구들과 함께 했던 어떤 술자리가 생각날 법한 글  – 술에 취해 운종교를 밟았던 일을 적은 글
  • 텍스트와 세상과 독자 사이의 팽팽한 긴장을 요구하는 비판적 읽기와 쓰기에 대한 강권- 소완정 기문
  • 양극단과 이분법을 넘어서는 연암의 인식론  – 말똥구슬 서문

독서하여 곧바로 어디에 써먹으려 하는 것은 모두 사사로운 마음이다. 평생토록 글을 읽어도 배움이 진전되지 않는 건 바로 이 사사로운 마움이 해를 끼쳐서다. (p 381)

연암의 말이다. ‘곧바로 어디에 써먹으려 하는 사사로운 마음 없이’  연암 읽기를 권한다.
금광은 그 자체로서 의미가 없다. 삽으로 파야 의미가 나온다. 당분간 많은, 고된 삽질을 즐겁게 할 것 같다.

by gre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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