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문장, 끝문장] 피로사회, 한병철 (2010년작)

* 주: 우리는 우리사회를 ‘피로사회’ 또는 ‘우울사회’로 정의하고 싶지 않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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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사회>
– 첫문장: ‘신경성 폭력’
시대마다 그 시대에 고유한 주요 질병이 있다. 그래서 이를테면 박테리아적이라고 할 수 있는 시대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시대는 적어도 항생제의 발명과 함께 종언을 고했다. 인플루엔자의 대대적 확산에 대한 공포가 여전히 무시할 수 없는 것이기는 하지만, 우리는 오늘날 더 이상 바이러스의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면역학적 기술에 힘입어 이미 그 시대를 졸업했다. 21세기의 시작은 병리학적으로 볼 때 박테리아적이지도 바이러스적이지도 않으며, 오히려 신경증적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신경성 질환들, 이를테면 우울증,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 경계성성격장애, 소진증후군 등이 21세기 초의 병리학적 상황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전염성 질병이 아니라 경색성 질병이며 면역학적 타자의 부정성이 아니라 긍정성의 과잉으로 인한 질병이다. 따라서 타자의 부정성을 물리치는 것을 목표로 하는 면역학적 기술로는 결코 다스려지지 않는다.

– 끝문장: 한트케는 내재적 성격을 지닌 피로의 종료를 구상한다. “근본적 피로”는 자아의 논리에 따른 개별적 고립화 경향을 해소하고 친족관계에 의존하지 않는 하나의 공동체를 만들어낸다. 그 속에서 어떤 특별한 박자가 일어나 하나의 화음을, 친근함을, 어떤 가족적 유대나 기능적 결속과도 무관한 이웃관계를 빚어낸다. “피로한 자는 또 다른 오르페우스로서 가장 사나운 동물들조차 그의 주위에 몰려들어 마침내 피로를 나눌 수 있게 된다. 피로는 흩어져 있는 개개인을 하나의 박자 속에 어울리게 한다.” 무위를 향해 영감을 불어넣는 저 “오순절의 모임”은 활동사회의 반대편에 놓여있다. 한트케는 거기 모인 사라들이 “언제나 피로한 상태”라고 상상한다. 그것은 특별한 의미에서 피로한 자들의 사회이다. “오순절-사회” 가 미래사회의 동의어라고 한다면, 도래할 사회 또는 피로사회라고 부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우울사회>
– 첫문장: 카프카는 대단히 난해한 단편 ‘프로메테우스’에서 몇차례에 걸쳐 프로메테우스 신화의 재해석 작업을 수행한다. 첫번째 재해석 시도에 따르면 “신들은 지쳤고 독수리도 지쳤으며 상처도 지쳐서 저절로 아물었다.” 나는 또 하나의 재해석을 통해 이 프로메테우스 전설을 내적 영혼의 장면으로, 즉 오늘날 스스로에게 폭력을 가하며 자기 자신과 전쟁을 치르고 있는 성과주체의 심리적 기구에 관한 묘사로 파악하고자 한다. 잘 알려진 것처럼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에게 불과 함께 노동도 가져다 주었다. 성과주체는 스스로 자유롭다고 믿지만 실은 프로메테우스처럼 묶여있다. 끝없이 다시 자라나는 프로메테우스의 간을 먹는 독수리는 성과주체와 전쟁을 벌이고 있는 제 2의 자아 (Alter Ego) 라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프로메테우스와 독수리의 관계는 자기 착취의 관계인 셈이다. 피로란 스스로는 고통을 느낄 줄 모르는 간의 고통이라고들 한다. 따라서 자기 착취의 주체인 프로메테우스는 엄청난 피로에 빠지고 말 것이다.

– 끝문장: 성과사회에서 호모 사케르의 생명은 완전히 다른 이유에서 신성하고 벌거벗겨져 있다. 호모 사케르의 생명은 모든 초월적 가치를 상실하고 생명 기능과 생명 활동이라는 내재적 가치로 축소되었다는 점에서 벌거벗은 것이다. 이제 문제는 모든 가능한 수단을 동원해서 생명의 성능을 극대화하는 일 뿐이다. 성과사회는 그 내적 논리에 따라 도핑사회로 발전한다. 단순한 생명기능으로 환원된 삶은 무조건 건강하게 유지해야만 하는 삶이다. 건강은 새로운 여신이다. 따라서 벌거벗은 생명은 신성하다. 성과사회의 호모 사케르는 절대로 죽일 수 없다는 점에서 주권사회의 호모 사케르와 구별되는 또 하나의 특징을 지닌다. 이들의 생명은 완전히 죽지 않은 자들 (Untote) 의 생명과 비슷하다. 그들은 죽을 수 있기에는 너무 생생하고 살 수 있기에는 너무 죽어있는 것이다.

출처: 문학과지성사, 김태환 역, 2012년 제 1판 제 18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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