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문장, 끝문장] 장마, 윤흥길 (1973년작)

* “정말 지루한 장마였다.”로 끝나는 소설 혹시 기억하시나요? 윤흥길의 중편소설 <장마> 는 6/25 전쟁을 배경으로 한 갈등과 화해, 성장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짧은 장마가 시작된 오늘, 한숨 돌리고 잠시 읽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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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문장: 밭에서 완두를 거두어들이고 난 바로 그 이튿날부터 시작된 비가 며칠이고 계속해서 내렸다. 비는 분말처럼 몽근 알갱이가 되고, 때로는 금방 보꾹이라도 뚫고 쏟아져 내릴 듯한 두려움의 결정체들이 되어 수시로 변덕을 부리면서 칠흑의 밤을 온통 물걸레처럼 질펀히 적시고 있었다.

동구 밖 어디쯤이 될까. 아마 상여를 넣어두는 빈 집이 있는 둑길 근처일 것이다. 어쩐지 거기라면 개도 여우만큼 길고 음산한 울음을 충분히 낼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보다 훨씬 더 먼 곳일지도 모른다. 잠시 꺼끔해지는 빗소리를 대신하여 멀리서 개 짖는 소리가 짬을 메우고 있었다. 그것이 저희들끼리의 무슨 군호나 되는 듯이 난리통에 몇 마리 남지 않은 동네 개들이 차례로 짖기 시작했다. 그날 밤따라 개들의 극성이 몹시도 유난했다. 그때 우리는 외할머니가 거처하는 건넌방에 모여 있었다. 외할머니의 심중에 뭔가 큰 변화가 생겨 우리는 그분을 위로하고 안심시켜 드리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머니와 작은이모는 개들이 사납게 짖기 시작하면서부터 갑자기 입을 다물어버렸다. 서로 외할머니의 눈치만 슬금슬금 살펴가며 모기장베가 붙어 있는 방문 쪽으로, 얼멍얼멍한 모기장베가 가린 둥 만 둥 막고 있는 어둠 저쪽으로 자꾸 눈길을 돌렸다. 나방이인지 하늘밥도둑인지 모를 날벌레 한 마리가 아까부터 날개를 발발 떨면서 방문에 붙어 끊임없이 오르내리고 있었다.

– 끝문장: 그만한 이야기를 나누는 데도 대번에 기운이 까라져 할머니는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가까스로 할머니가 잠들기를 기다려 구완을 맡은 고모만을 남기고 모두들 큰방을 물러나왔다. 그날 저녁에 할머니는 또 까무러쳤다. 의식이 없는 중에도 댓숟갈 흘려 넣은 미음과 탕약을 입 밖으로 죄다 토해 버렸다. 그해 주었다. 나도 마음속으로 할머니의 모든 걸 용서했다. 난꾸러기가 들어왔다 나갔다 숨바꼭질하기를 수없이 되풀이하는 것 같은 고통의 시간의 연속이었다. 대소변을 일일이 받아내는 고역을 치러가면서 할머니는 꼬박 한 주일을 더 버티었다. 안에있는 아들보다 밖에 아들을 언제나 더 생각했던 할머니는 마지막 날 밤에 다 타버린 촛불이 스러지듯 그렇게 눈을 감았다. 할머니의 긴 일생 가운데서, 어떻게 생각하면, 잠도 안 자고 먹지도 않고 그러고도 놀라운 기력으로 며칠 동안이나 식구들을 들볶아대면서 삼촌을 기다리던 그 짤막한 기간이 사실은 꺼지기 직전에 마지막 한순간을 확 타오르는 촛불의 찬란함과 맞먹는, 할머니에겐 가장 자랑스럽고 행복에 넘치던 시간이었나 보다. 임종의 자리에서 할머니는 내 손을 잡고 내 지난날을 모두 용서해 주었다. 나도 마음속으로 할머니의 모든 걸 용서했다.

정말 지루한 장마였다. 

출처: 윰프의 숲, 링크
진출처: Acase 사무실에서 바라본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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