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문장, 끝문장] 자전거여행, 김훈 (2000년작)

자전거여행수정

 

* 휴가와 여행, 그리고 금요일이다.
김훈의 글은 땅을 밟지 않는다.
자전거 페달은 사람의 몸과 하나가 되어 인생의 바퀴를 굴린다.

– 책 머리에

벗들아, 과학과 현실의 이름을 들먹여가며 이 가엾은 수사학을 조롱하지 말아다오. 나는 마침내 내 자신의 생명만으로 자족할 수 없고, 생명과 더불어 아늑하지 못하다. 그리고 이 부장만이 나의 생명을 증거할 것이다.

살아서 아름다운 것들은 나의 기갈에 물 한 모금 주지 않았다. 그것들은 세계의 불가해한 운명처럼 나를 배반했다. 그러므로 나는 가장 빈곤한 한 줌의 언어로 그 운명에 맞선다. 나는 백전백패할 것이다.

만경강 저녁 갯벌과 거기에 내려앉는 도요새들의 이야기를 쓰던 새벽 여관방에서 나는 한 자루의 연필과 더불어, 말하여질 수 없는 것들의 절벽 앞에서 몸을 떨었다. 어두워지는 갯벌 너머에서 생명은 풍문이거나 환영이었고 나는 그 어두운 갯벌에 교두보를 박을 수 없었다. 나는 아무 것도 만질 수 없었다. 아무 곳에도 닿을 수 없는 내 몸이 갯벌의 이쪽에 주저앉아 있었다.

1999년 가을부터 2000년 여름까지 전국의 산천으로 끌고 다닌 내 자전거의 이름은 풍륜(風輪)이다. 이제 풍륜은 늙고 병든 발처럼 다 망가졌다. 2000년 7월 풍륜을 퇴역시키고 새 자전거를 장만했다. 이 책을 팔아서 자전거값 월부를 갚으려 한다. 사람들아 책 좀 사가라.

갈 수 없는 모든 길 앞에서 새 바퀴는 얼마나 아름다운가. 아, 아무 것도 만질 수 없다 하더라도 목숨은 기어코 감미로운 것이다, 라고 나는 써야 하는가. 사랑이여, 이 문장은 그대가 써다오.

52살의 여름에 김훈은 겨우 쓰다

– 첫문장: 자전거를 타고 저어갈 때, 세상의 길들은 몸 속으로 흘러 들어온다. 강물이 생사가 명멸하는 시간 속을 흐르면서 낡은 시간의 흔적을 물 위에 남기지 않듯이, 자전거를 저어갈 때 25000분의 1 지도 위에 머리카락처럼 표기된 지방도‧소로‧임도‧등산로 들은 몸 속으로 흘러 들어오고 몸 밖으로 흘러나간다. 흘러오고 흘러가는 길 위에서 몸은 한없이 열리고, 열린 몸이 다시 몸을 이끌고 나아간다.

– 끝문장: 김훈과 그의 자전거 풍륜 – 캡션: “노령산맥을 넘다 잠시 풍륜에 기대어 쉬다. 인간의 육신은 그와 함께하는 모든 사물과 정한(情恨)을 나누게 되는가. 긴 여행 끝에 어찌할 수 없이 망가진 풍륜과의 작별, 잘 가거라 나의 풍륜이여, 나의 늙은 연인이여.”

출처: 생각의 나무, 2000년 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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