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채홍의 디자인커뮤니케이션] “영원한 여름The Eternal Summer”의 추억을 떠올리는 그림을 만나다

1. 기억과 추억과 환상을 버무린 “영원한 여름The Eternal Summer”

이번 주 ‘더 뉴요커’ 표지는 아스라한 여름의 추억을 일깨운다. 때때로 아름다운 표지를 선물해주는 ‘더 뉴요커’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오래된 느티나무 같은 커다란 나무. 짙은 녹음 사이로 한여름의 빛이 반짝이고 한 소년이 길게 늘어진 그네를 탄다. 아무도 없고 새들만이 소년을 지켜보고 있다. 소년은 몸을 한껏 젖혀 그네에 탄력을 붙인다. 귓가에 바람이 스친다.

the new yorker

그래픽 노블 작가로도 잘 알려진 에릭 드루커(Eric Drooker)의 그림이다. 에릭 드루커는 자신이 뉴욕에서 나고 자란 토박이란 것과 어린 시절에 비하면 도시가 엄청나게 바뀌었다는 것, 도시 소년에게 그네가 달린 이 커다란 나무는 정말이지 하나의 환상과도 같은 장면이라고 말한다. 이를테면 그건 자기 마음속에 자리 잡은 ‘영원한 여름’의 이미지라는 것. 아마도 작가는 어린 시절의 뉴욕 생활을 떠올리며 경험하지는 못했지만, 도시 소년이 꿈꾸고 간직해왔던 환상적인 여름 풍경을 그려낸 것 같다.

2. 과거를 소유하는 일, ‘기억’과 ‘추억’

얼마 전 읽은 책의 한 대목이 떠올라 인용한다.

초대 받아 간 친구 집에서 어린 소녀를 만났다. 부모님과 함께 온 어린 소녀는 문으로 들어서다가 뭔가를 보고는 깜짝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옛날에는 이렇지 않았는데!”
과거를 소유하는 일은 이렇게도 일찍 시작된다! 과거, 그러니까 옛날이 지금보다 나은 이유는 지금보다 뭔가 하나 더 있기 때문이다. ‘추억’이라는 것. 여기에는 모든 것이 지금과 아주 달랐을 때 자기도 그걸 경험했다는 기억도 포함된다. 노화 현상 중 하나다. 앞에서 말한 어린 소녀도 겪는 노화 현상. 이 현상은 얼마나 일찍 시작되는가. 그리고 우리는 어린 소녀도 나이가 있다는 걸 얼마나 쉽게 잊고 사는가.
– 페터 빅셀, “나는 시간이 아주 많은 어른이 되고 싶었다”, 전은경 옮김, 푸른숲, 2009, p.29

그렇다. 젖먹이 시기를 지나고 무언가를 비로소 기억할 수 있는 유년기에서부터 추억은 시작된다. 그 추억과 함께 우리는 계속 살아간다.

3. 나만의 “영원한 여름The Eternal Summer”을 떠올리다

막 잠이 든 우리를 삼촌이 흔들어 깨웠다. 오늘이 칠월 칠석 날이니 지금 바다에 나가 달을 보아야 한다고 했다. 누나와 나, 사촌 동생, 그리고 고모와 함께 삼촌을 따라 나섰다. 전기도 들어 오지 않는 시골 길을 랜턴과 달빛에 기대어 삼십여 분을 걸어 바다에 닿았다. 삼촌이 어디론가 뛰어가더니 잠시 뒤 배 한 척을 저으며 나타났다. 고물에 기다란 노가 하나 달린 작은 거룻배였다. 몰래 ‘빌려온’ 배였다. 목소리를 죽이고 한 사람씩 배에 올랐다. 삼촌은 빠르고 익숙하게 노를 저어 바다로 나아갔다. 노가 움직일 때마다 검은 바닷물에서 파란빛이 일었다. 그게 발광프랑크톤 때문이란 건 나중에 알았다. 달이 높이 뜬 바다 한가운데에서 배는 멈추었다. 우리는 뱃전에 기대어 바닷물에 손을 담그고 휘저었다. 물속에 잠긴 손이 반짝였다. 손을 들어 올리면 손가락 끝에서 파란 불빛이 이내 물방울로 변해 뚝뚝 떨어졌다. 거기에 정신을 뺏기고 있을 때 갑자기 삼촌이 웃통을 벗었다. 숨을 깊이 들이쉬고는 배 옆쪽으로 다이빙했다. 커다랗고 파란 불빛 덩어리가 배 밑창을 감싸고 돌았다. 곧이어 불빛이 물 위로 솟구쳤다. 배가 흔들렸다. 그때 삼촌은 마치 고래 같아 보였다. 결코, 잊을 수 없는 ‘영원한 여름’의 장면이다.

얼마 전, 영화 “파이 이야기”를 보다가 전율했다. 바다를 표류하던 파이가 밤바다에서 발광플랑크톤의 빛에 매료되어 뗏목 위에서 바닷물을 휘젓는 장면, 그리고 거대한 고래가 파란 불빛이 되어 솟구치는 장면은 내 어린 시절의 명장면을 소름 끼치도록 상징적으로 재현하고 있었다.

4. 예술가들에게 감사하다

살아가면서 아름다운 추억 하나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잡지 표지의 그림에서, 영화에서 새삼 깨닫는다.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예술가들이지만, 그들에게 고맙다.

서채홍

이미지 출처: THE NEW YORKER

Leave a Reply

Fill in your details below or click an icon to log in:

WordPress.com Logo

You are commenting using your WordPress.com account. Log Out / Change )

Twitter picture

You are commenting using your Twitter account. Log Out / Change )

Facebook photo

You are commenting using your Facebook account. Log Out / Change )

Google+ photo

You are commenting using your Google+ account. Log Out / Change )

Connecting to %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