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케이스 풍경] 라오스 여행기 2 – 만남, 생각, 그리고 기록

프랑

“나는 종이가 먼저 떨어질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먼저 떨어진 것은 연필이었다.”
– <라이프 오브 파이> 중, 표류하는 배 위에서 마지막 글자를 쓴 뒤 독백

망망대해에서 벵골호랑이와 단 둘이 표류하는 인도 소년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를 보셨다면 이 장면을 기억하실지 모르겠다. 생각과 기억은 언어를 매개로 한다. 대신 기억해줄 사람이 아무도 없는 곳에서 글을 쓰게 되는 것은 그래서 어쩌면 당연하다. <라이프 오브 파이>에서 주인공 파이는 필사적으로 모든 것을 적어나가지만 비바람에 기록장을 날려버린다. 파이가 바다에서 실제로 무슨 일을 겪었는지 알 수 없게 결론지어진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가져간 공책의 종이가 떨어질 때까지 글을 쓰는 것이 이번 라오스 여행의 목표 중 하나였다. 내 생각과 낯선 이의 생각을 되도록 많이 기록하고 싶었다. 라오스 여행기 2에서는 다른 곳에 사는 사람들이 했던 말을 적으려 한다. 글을 쓰겠다는 허락을 구하지 않았기 때문에 모두 익명 처리했다.

1. 여행자가 여행자를 만났을 때

1-1 30대 프랑스 여성 두 명, 10년 지기.

라오스에는 누운 부처상이 참으로 많다. 한가로워 보이는 와불은 라오스의 분위기를 닮았다. 와불 석상이 있는 공원 씨엥쿠왕 주변 방갈로에서 첫 만남이 이뤄졌다. 옆 들판에서는 소들의 목에 달린 워낭소리가 청량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나는 방갈로에서 라오맥주를, 프랑스 여성 두 명은 코코넛을 먹고 있었다. 내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 서로의 휴가와 여행에 대해, 좋아하는 영화와 책 등에 대해 이야기했다. 우리는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서 그날 밤 9시에 다시 만나기로 했다. 사실 혼자 여행을 하는 것이 무섭기도 해서 밤에는 나가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세웠었는데, 친구가 있다면야.

“아 맞아. 나도 들어본 적이 있어. 한국에서 나이를 계산하는 방식이 우리와 다르다며? 뱃속에 있을 때부터 인간으로 치기 때문에 태어나자마자 1살이라는 거 맞지? 어떻게 보면 더 논리적인 것 같아. 한국에서는 낙태가 불법이라고 들었어. 뱃속의 태아도 사람이라고 치기 때문에 그런 것 같아. 프랑스에서는 뱃속의 아기는 사람으로 치지 않아. 그래서 낙태가 합법인 것 같아.”

(우리나라의 경우 성폭행이나 근친상간으로 임신된 경우나 임신부의 생명이 위험하거나 태아가 신체적·정신적 건강에 결함이 있을 때를 제외하고는 낙태를 불법으로 규정하고 있다. 프랑스는 임신부의 요청이 있으면 낙태를 허한다.)

“여기서 라오스 음악을 들었는데 되게 신나더라. 프랑스 음악도 좋아. 가수를 몇 명 추천해줄게. 나는 Jacques Brel, Georges Brassens, Zebda, Cali, Alexandre Tharaun, Jacques Higelin을 좋아해.”

헤어지면서는 난생 처음으로 프랑스식 인사를 했다. 볼이 좀 끈적끈적해서 미안했다.

1-2 20대 독일 남자 대학생

비엔티엔에서 루앙프라방으로 갈 때 버스를 탔다. 11시간을 달린 후 버스터미널에 닿았다. 오토바이를 개조한 일종의 택시인 툭툭을 타고 중심가로 가야 했다. 혼자 툭툭을 타면 돈이 많이 들기 때문에 버스를 같이 탄 사람에게 말을 걸었다. 독일 남성이었다. 중심가에 도착한 후 장시간 운행에 지친 갈증을 달래기 위해 맥주를 마셨다.

“내 친구 중에는 한국-독일 혼혈인이 있어. 그 친구가 적극 추천을 해줘서 박찬욱의 <올드보이>를 봤는데 내 타입은 아니더라. 그보다 나는 알파치노가 나오는 모든 영화를 좋아해. 나 그리고 한국말 중에 유일하게 아는 말이 있어. 벤쿠버에서 지낸 적이 있는데 거기에 젊은 한국인들이 많았거든.”

우리가 흔히 아는 욕이었다.

2. 여행자가 현지인을 만났을 때

2-1 수도 비엔티엔의 22살 24살 여자 직장인, 사돈관계

비엔티엔에는 메콩강이 흐른다. 한강변처럼 저녁에 앉아 있기 좋다. 이 곳에서 여자애 둘이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말을 걸고 싶어서 거짓말을 했다. “나는 한국 대학생이고, 타문화를 공부하고 있어. 몇 가지 물어봐도 될까?” 그들은 흔쾌히 수락해줬다. 22살 여자애만 영어를 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 친구와 주로 대화를 했다.

“아이를 기르고 요리를 하고 집안일을 하는 전통적 여성의 일은 매우 중요해. 10년이 지나도 남자가 남자의 일을 하고 여자가 여자의 일을 하는 것은 변함없을 거야.
나의 꿈은 호텔이나 스파, 레스토랑의 매니저가 되는 거야. 여성의 일을 하는 것과 나의 꿈을 이루는 것은 모두 중요해. 하지만 하나를 고르자면 나에게는 꿈을 이루는 게 더 중요해. 어머니가 어떻게 사는지 이미 봤기 때문에 새로울 게 없거든. 때때로 불합리하다고 느껴지기도 했어.”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계절은 여름이야. 예전 직장에서는 주로 밖에서 일했지만 지금은 사무실 안에서 일해. 그래서 여름에 한창 더울 때는 에어컨 나오는 시원한 곳에 있을 수 있어. 그래서 나에게 여름은 여름밤인 셈인데 나는 여름밤을 좋아해.”

“너는 학교까지 1시간 30분 거리를 통학한단 말이야? 우리 고향집도 여기서 1시간 30분 떨어진 거리에 있어. 하지만 너무 멀기 때문에 나와서 살고 있지.”

2-2 25살 남자 대학생, 라오스식 레스토랑 웨이터

<론리플래닛>에서 추천한 라오스식 레스토랑에 갔다. 한 번도 들어보지 못 했던 요리가 적힌 메뉴판이 나왔다. ‘라오스식’이라고 써있는 페이지에서 가장 위에 적힌 메뉴를 주문했다. 레몬그라스라는 허브에 고기를 채운 요리와 동남아식 스티키라이스(동남아식 밥)가 나왔다. 이 레스토랑에는 요리를 먹는 법을 친절하게 알려주고 손님이 많지 않은 시간에는 말벗까지 해주는 웨이터들이 있었다. 그 중 한 명은 루앙프라방에서 농업을 전공하는 대학생이었다. 이 친구에게 라오스에 대한 질문을 몇 개 했는데 굉장히 세세하고 친절하게 알려주었다.

“라오스는 미국에 한 번, 일본에 한 번, 프랑스에는 두 번이나 점령을 당한 역사가 있어. 이 때문에 농업의 여건이 매우 좋지 않아. 농업을 열심히 해도 농민들에게 돌아오는 것이 별로 없어. 나는 농업에 대해 공부를 하고 이 환경을 바꾸는 데 일조하고 싶어.”

“대학에 가지 않는 라오스 남녀들은 대개 18세에 결혼을 해. 대학에 가는 경우엔 20대 중반 정도에 많이 결혼을 해. 한 번 결혼하면 이혼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 결혼 전에 사귀는 것은 자유지만 나는 결혼할 사람 외에는 사귀고 싶지 않아. 나는 알던 사람과 오래오래 이야기를 나눈 후 결혼하고 싶어. 하지만 만약 부모님이 짝을 정해준다면 맞는 짝을 잘 골라줬을 거라 생각해.”

기록 김정현

* [에이케이스 풍경] 라오스 여행기 이전 글을 보시려면
– [에이케이스 풍경] 라오스 여행기 1 – 그곳도 누군가가 그리는 고향이다. https://acase.co.kr/2013/09/03/laos1/

One Response to [에이케이스 풍경] 라오스 여행기 2 – 만남, 생각, 그리고 기록

  1. Pingback: [에이케이스, 풍경] 라오스 여행기 3 – 외부 자극과 커뮤니케이션하는 라오스 사람들의 방식 | Acase

Leave a Reply

Fill in your details below or click an icon to log in:

WordPress.com Logo

You are commenting using your WordPress.com account. Log Out / Change )

Twitter picture

You are commenting using your Twitter account. Log Out / Change )

Facebook photo

You are commenting using your Facebook account. Log Out / Change )

Google+ photo

You are commenting using your Google+ account. Log Out / Change )

Connecting to %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