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커뮤니케이션] 내 몸 안의 블랙미러 – 완벽한 관심을 가지고 바라보라

파르미지아니노 자화상

파르미지아니노 자화상

1. 완벽한 관심이 있는 풍경

“공기가 다르죠. 거기는 자동차, 기름, 화학제품 냄새란 게 없어요. 자동차 소리도 없고요. 색깔도 다릅니다. 회색 콘크리트 세상이 아닌 녹색 삼림이 펼쳐져 있고,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도처에서 들립니다. 그리고 모든 대화는 마치 지금 우리가 인터뷰하듯 사람 대 사람, 면 대 면으로 이뤄집니다. 반면 미국이나 유럽 같은 문명사회에선 사람 대 기계 소통이 주를 이루죠. 어쩌다 사람 대 사람이 만나서 얘기를 하려 해도, 특히 젊은 친구들은 대화 시간의 대부분을 스마트폰이나 아이팟에 고개를 파묻고 보냅니다. 이건 도대체 누구와 얘기하는 건지 분간이 힘들어요. 뉴기니에선 대화를 할 때 상대편의 완벽한 관심(full attention)을 받을 수 있습니다. 눈과 눈은 서로 바라보고 귀는 스마트폰의 전자음이 아닌 상대방 목소리에 집중합니다.”
– 조선일보, 2013년 9월 7일자, “총,균,쇠”의 저자 재러드 다이아몬드 인터뷰 기사 중에서

2. 서로에게 무관심한 종합병원 입원실 풍경

둘째 아이가 갑작스레 천식 증세를 일으켜서 5일 동안 병원에 있었다. 이틀이 지나고 아이가 기력을 되찾을 무렵 병실 안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병상의 아이와 보호자 대부분이 스마트폰과 태블릿 PC를 들여다보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이 병원은 침대에 하나씩 태블릿 PC가 달려 있었다. 아들 녀석도 기력을 찾자마자 태블릿 PC에 매달렸다. 6인실 병실이 아주 조용했다. 각자 가족끼리만 가끔 대화를 나눌 뿐이었다. 예전엔 병실 풍경이 이렇지 않았다. 어색한 시간은 잠깐이고 부모들끼리 아이의 상태에 관해 얘기를 나누거나 내 아이 남의 아이 할 것 없이 서로 아이를 어르고 달래는 모습이 흔했다. 퇴원할 무렵이면, 진심으로 쾌유를 바라며 헤어졌다.

입원실의 이상한 정적(?)을 깨뜨린 사람은 손녀를 데리고 입원한 한 할머니였다. 모든 스마트 기기를 다룰 줄 모르는 할머니가 걸쭉한 입담으로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니면서 이 ‘조용하고 무관심한 평화 상태’에 비로소 균열이 생겼다. 이튿날 퇴원하는 바람에 그 이후의 극적인 변화를 목도하지 못한 것이 조금 아쉽다.

3. 우리 몸에도 ‘블랙 미러’가 있다

요즘 세간에 좀 알려진 영국드라마 ‘블랙 미러’는 가까운 미래에 벌어질 수도 있는 새로운 미디어 환경과 인간 관계의 커뮤니케이션 문제를 주로 다룬다. ‘블랙 미러 black mirror’는 미디어를 상징하는 것인데, 우리가 들여다보는 대부분의 디스플레이 장치가 검은색이라는 것에 착안한 명명인가 보다(화면이 꺼지면 검은색이 되고 거기에 우리 모습이 비친다). ‘미러mirror’의 의미도 간단치 않다. 자신을 들여다보는(외양뿐 아니라 내면까지) 도구인 거울은 오랜 옛날부터 수많은 예술작품에서 상징과 알레고리로 쓰였다.

대부분 잊고 지내지만, 우리 몸에도 블랙 미러가 달려 있다. 이것을 설명하려면 16세기에 그려진 그림 하나를 불러와야 한다.

4. 사랑하는 이에 대한 완벽한 관심의 표현 – 파르미지아니노 자화상

이 그림은 파르미지아니노(Parmigianino, 1503~1540)가 그린 자화상이다. 미술사에선 르네상스에서 바로크 시기로 넘어가는 과도기의 매너리즘 사조를 대표하는 화가로 알려져 있다. 1994년 “예술사” 교양강좌에서 이 그림을 처음 보았다. 캔버스가 둥글고 마치 볼록 거울처럼 튀어나왔다. 누구나 화가가 볼록거울에 자기를 비춰보며 그린 거로 생각했다. 슬라이드로 그림을 보여 주던 강사는 그러나 보통 볼록거울은 아니라고 했다. 인물 뒤쪽 어슴푸레하게 보이는 공간을 조목조목 짚어가며 일반적인 볼록거울에서 나타나는 반영과의 차이를 설명했다. 볼록거울이되 자연에 있는 볼록거울이라고 했다. 강사는 독일 유학시절 함께 수강한 학생들과 한 한기 내내 이 그림 하나를 붙들고 연구했다는 말도 덧붙였다.

“어떤 거울일까요?”
퀴즈를 내듯 강사가 물었고 한동안 침묵이 흐른 뒤에 누군가가 단 한마디로 외쳤다.
“눈!”
바로 눈이었다. 그것도 사랑하는 사람의 눈이었다. 화가의 왼손(반영된 상이므로) 새끼 손가락에 낀 반지는 당시에 약혼을 의미했다. 사랑하는 사람 눈 속에 비친 자기 모습을 자화상으로 표현한 거였다. 이 그림, 이 작고 둥근 캔버스는 이를테면 사랑하는 사람의 눈인 것이다.

누군가의 눈을 깊이 들여다보면 그 눈 속에 비친 나를 볼 수 있다. 이 평범한 사실을 잊고 지낼 때가 많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아끼고 배려한다면 그 눈을 깊이 들여다보아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 비로소 상대도 내 눈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볼 것이다.

* 이 그림은 아주 작다. 지름이 24.4센티미터에 불과하다. 그리고 파르미지아니노는 남자다.

서채홍

사진 출처: 링크

Leave a Reply

Fill in your details below or click an icon to log in:

WordPress.com Logo

You are commenting using your WordPress.com account. Log Out /  Change )

Google+ photo

You are commenting using your Google+ account. Log Out /  Change )

Twitter picture

You are commenting using your Twitter account. Log Out /  Change )

Facebook photo

You are commenting using your Facebook account. Log Out /  Change )

Connecting to %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