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문장, 끝문장] 알랭 드 보통의 영혼의 미술관, 알랭 드 보통 (2013년작)

알랭 드 보통의 영혼의 미술관

알랭 드 보통의 영혼의 미술관

에이케이스에선 ‘[디자인 커뮤니케이션] 미술관은 우리의 깊은 내면을 위한 ‘약국’이다 – 알랭 드 보통이 생각하는 미술관의 의미와 커뮤니케이션 방식’이란 글을 소개했었다. (링크: https://acase.co.kr/2013/10/14/designcomm15/) 그는 미술품이 우리 내면을 힐링하는 ‘도구적 역할’을 해야 하며, 이를 위해 학술적, 역사적인 분류로 나뉜 미술관 전시 방식도 바뀌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런 그의 생각이 담긴 ‘알랭 드 보통의 영혼의 미술관’이 국내 출판되었다.

‘이 책은 (디자인, 건축, 공예를 포함한) 예술이 관람자를 인도하고, 독려하고, 위로하여 보다 나은 존재 형태가 되도록 이끌 수 있는 치유 매개라고 제언한다. 도구는 소망을 이룰 수 있게 해주는 신체의 연장물로, 우리에게 주어진 신체 구조상의 취약점 때문에 필요가 발생한다. 예술의 목적을 발견하려면 우리는 어떤 문제들이 우리의 마음과 감정을 다스리는 데 필요하면서도 우리에게 곤란함을 안겨주는지 물어야 한다. 예술은 어떤 심리적 취약점에 도움이 될 수 있는가? 지금까지 일곱 개의 취약점이 확인되었고, 그러므로 예술에는 일곱 가지 기능이 있다고 볼 수 있다.’ -머리말-

예술의 일곱 가지 기능뿐 아니라 사랑, 자연, 돈, 정치 등에 대한 그의 생각을 그림을 통해 드러낸다. 스스로 엄선해 수록한 140여 미술품은 훌륭한 조미료로 쓰인다. 미술관에 대한 왠지 모를 부담을 느끼거나, 치유가 필요한 사람이면 꼭 일독을 권한다. 물론 그의 팬들도 좋아할 것이다. 특유의 통찰과 세련된 문체가 어김없이 배어있다. 그가 생각한, 예술의 손길이 필요한 심리적 취약점 7개를 다룬 본문 일부를 발췌, 소개한다. 때론 글보다, 한 장의 그림이 묵직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1. 희망

우리는 거의 항상 장밋빛의 감상적인 눈으로 세상을 보기는커녕 과도한 우울로 고생한다. 우리는 세계의 문제와 부당함을 잘 알고 있지만, 단지 그 앞에서 작아지고 약해지고 초라해질 뿐이다. 유쾌함은 멋진 성과이고, 희망은 축하할 일이다. 낙천주의가 중요하다면, 이는 우리가 낙천적이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는가에 따라 많은 결과들이 좌우되기 때문이다. 이 노력은 성공의 중요한 요인이다. 우리의 운명은 재능의 부족이 아니라 희망의 부재가 결정할 수 있다.

앙리 마티스, 춤 2, 1910년

앙리 마티스, 춤 2, 1910년

마티스의 그림에서 춤을 추는 사람들은 이 행성이 고민거리로 가득하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지만, 우리와 현실의 관계가 껄끄러우며 그런 관계가 일상적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그들의 태도는 우리에게 용기를 줄 수 있다. 그들은 세상에서 어쩔 수 없이 마주치게 되는 거절과 굴욕에 대처할 줄 아는 우리 자신의 유쾌하고 무사태평한 능력을 일깨워준다. 희망은 이런 모습일 수도 있는 것이다.

2. 균형 회복

예술의 한 역할이 우리의 정서적 균형을 회복시켜주는 데 있다는 생각은, 왜 사람들의 미학적 취향이 그렇게 다른가라는 곤란한 질문에도 답이 되어줄 법하다. 왜 어떤 사람은 미니멀리즘 건축에 이끌리고, 어떤 사람은 바로크 건축에 이끌릴까? 이런저런 종류를 더 좋아하는 성향은 사람들의 다양한 심리적 차이를 반영한다. 우리는 자신의 내적인 나약함을 보완해줌으로써 우리를 생존의 평균치로 되돌려놓는 예술작품을 갈망한다. … 삶에서 사라지고 있는 것을 보완하기 위해 예술을 이용할 수 있는 주체는 개인뿐만이 아니다. 인간 집단, 더 나아가 사회 전체도 우리의 삶을 균형 있게 잡아주기 위해 예술에 의존할 수 있다.

조선왕조, 백자 달항아리, 17-18세기

조선왕조, 백자 달항아리, 17-18세기

도덕적 메시지, 보다 나은 자아로 거듭나라는 메시지는 애초에 우리에게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듯 보이는 예술작품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한국의 백자 달항아리가 있다. 이 항아리는 쓸모 있는 도구였다는 점 외에도, 겸손의 미덕에 최상의 경의를 표하는 작품이다. … 가마 속으로 뜻하지 않게 불순물이 들어가 표면 전체에 얼룩이 무작위로 퍼졌다. 이 항아리가 겸손한 이유는 그런 것들을 전혀 개의치 않는 듯 보여서다. 그 결함들은 항아리가 신분 상승을 향한 경주에 무관심하다고 시인할 뿐이다. 거기엔 자신을 과도하게 특별한 존재로 생각해달라고 유구하지 않는 지혜가 담겨 있다. 항아리는 궁색한 것이 아니라 지금의 존재에 만족할 뿐이다. 세속의 지위 때문에 오만하거나 불안해하는 사람에게 또는 이런저런 집단에서 인정받고자 안달하는 사람에게, 이런 항아리를 보는 경험은 용기는 물론이고 강렬한 감동을 줄 수 있다.

3. 자기 이해

우리는 자기 자신을 투명하게 알지 못한다. 우리에겐 직관, 의혹, 육감, 모호한 공상, 이상하게 뒤섞인 감정이 있으며, 이 모두는 단순 명료한 판단을 방해한다. 여러 기분을 느끼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 그러다가 이따금 예전에 느꼈지만 명확히 알지 못했던 어떤 것을 정확히 파악한 듯 보이는 예술작품들과 우연히 마주한다.

사이 툼블리, 파노라마, 1957년

사이 툼블리, 파노라마, 1957년

사이 툼블리가 만든 검고, 긁힌 자국이 있는, 암시적인 표면을 찬찬히 살펴보면 내가 지금까지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나 자신의 일면을 비춰주는 거울 앞에 선 느낌이 든다. 단, 지금 거울에 비춰볼 것은 어금니가 아니라 내면의 경험이다. 당혹스러우리만치 포착하기 어려운 기분 또는 심리(또는 영혼)의 상태를 경험할 때가 있다. 우리는 그런 상태를 자주 경험하지만, 그것을 따로 떼어 확인하거나 들여다보지는 못한다. 톰블리의 작품은 내면의 삶의 한 부분을 보여주기 위해 특수 제작한 거울과 같다. 내면에 집중함으로써 자아를 더 분명하고 더 쉽게 확인할 수 있도록 의도적으로 제작되었다. 이 작품은 우리가 어떤 것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거의 알 듯하면서도 아직 그 실마리가 조금 부족할 때의 기분에 집중하고 있다. 우리는 곧 이해할 듯하면서도 아직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이 알쏭달쏭한 순간이 중요한 까닭은 성찰이 우리의 기대에 못 미치기 때문이다. 우리는 성찰의 과정을 포기한다. 우리는 사랑, 정의 또는 성공의 개인적 의미를 대부분 결정하지 못한 채 다른 것으로 넘어간다. 툼블리의 그림을 보는 동안 우리는 중대한 생각에 도달할 수 있다. ‘중요한 문제들에 대해 생각하다 결국 혼란에 빠지고 만 나를 충분히 인식하지 못했구나. 그 부분에 제대로 주목하지 못했구나. 하지만 지금 나는 예술이라는 거울에 비친 나의 바로 그런 모습을 보고 있다. 이제 나는 이런 내 모습을 더 소중히 여길 수 있게 됐어.’

이현동

출처: 알랭 드 보통, <알랭 드 보통의 영혼의 미술관>, 문학동네, 2013년 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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