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대통령과 함께한 전략적 글쓰기 4] 뺄 것이 없을 때까지 줄여라

다이어트 해야 할 것은 살만이 아니다.
– 글은 짧을수록 좋다

“할 말이 별로 없으면 짧게 하는 것으로도 한몫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좀 더 간결하게 다듬어 보십시오.”
<2005년 11월 APEC 정상회의 공식 만찬사>

“가급적 줄일 수 있으면 더 줄여주기 바랍니다. 핵심이 없이 지루한 글은 짧은 것만 못합니다. 길이를 줄이는데 망설일 일은 아닙니다.”
<2005년 12월 말레이시아 경제인 오찬 연설문>

“짧은 글일수록 압축된 어휘와 간결한 문장으로 써야 힘이 생깁니다. 다시 한 번 다듬어 주시기 바랍니다.” <2006년 1월 신년사>

“내용이 너무 길면 긴장감을 잃으면서 지루하고 문장이 어려워집니다. 듣다가 앞의 얘기를 기억하지 못할 정도가 된다면 문제입니다.”
<2006년 11월 제43회 무역의 날 기념사>

연설비서실에서 올린 초안에 대한 노무현 대통령의 코멘트다.
모두 줄일 수 있으면 더 줄이라는 주문이다.
글쓰기의 기초에 대한 지적이다.
아직도 이 내용을 보면 얼굴이 화끈거린다.

그렇다.
전하고자 하는 내용을 전할 수만 있다면 글은 짧을수록 좋다.
글이 길다고 감동이 더 있고, 더 깊은 인상을 주는 것은 아니다.
광고 카피처럼 때로는 한 문장, 단어 하나가 긴 글보다 더 힘 있고 감동적인 경우가 많다.
오히려 글이 길면 초점이 흐려지고, 읽는 이로 하여금 말하고자 하는 핵심이 무엇인지 파악하기 어렵게 할 공산이 크다.

더 큰 문제는 이런 저런 말을 늘어놓다 보면 오해와 억측을 나을 수 있다는 점이다.
특히 언론에 발표하는 성명서나 어떤 사안에 대해 해명을 하는 경우에는 각별히 유념해야 한다.
글의 초점을 잘못 해석하거나 의도적으로 왜곡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 “당신의 글에 이런 내용이 있지 않느냐?”고 꼬투리를 잡아도 할 말이 없다.

굳이 이런 악의적인 경우가 아니더라도, 읽는 사람의 수고와 시간을 배려하는 것은 중요하다.
별다른 감동도, 유익도, 재미도 없는 글을 긴 시간 읽게 하는 것은 도리가 아니지 않은가.

노무현 대통령은 늘 자신이 전하고자 하는 바를 함축하는 한 단어, 한 문장을 찾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예를 들어, 인사 청탁은 안 된다는 단호함을 보이기 위해 “인사 청탁하면 패가망신한다.”는 말을, 부동산 투기 근절 의지를 전하기 위해 “강남불패면 노무현도 불패다.”라고 말했다.

독자나 청중은 긴 글이나 장황한 말 속에서 한 단어, 한 문장만 기억한다는 게 노 대통령의 지론이다.
글을 쓸 때는 바로 그 문장을 찾아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한 문장을 어떤 때는 ‘표어’라고도 했고, ‘카피’, ‘명제’라고도 했다.
바로 이 표어, 카피, 명제를 놓고 늘 고심했다.

짧은 글쓰기는 긴 글보다 결코 쉽지 않다.
짧은 글 속에 모든 것을 얘기해야 하고, 또한 핵심을 찔러야 하기 때문이다.

에이브러햄 링컨의 게티즈버그 연설은 단 266개 단어였다.
이 자리에 함께 했던 당대 최고의 웅변가 에드워드 에버렛은 2시간 가까운 연설을 했다.
그야말로 ‘연설하고 있네.’를 몸소 보여준 것이다.
결국 아무도 에버렛의 말을 기억하는 사람은 없다.

누구나 아는 얘기 중에, 더 극단적인 사례도 있다.
프랑스 작가 빅토르 위고가 출판사에 원고를 보낸 후 반응이 궁금해서 이렇게 편지를 보냈다.
“?”
이에 대해 출판사에서 답을 보내왔다.
“!”
그 결과로 <레미제라블>이 탄생했다.

혀가 짧아 고생했던 처칠도 짧은 연설로 유명하다.
“포기마라, 포기마라, 절대 포기하지 마라.”
1941년 영국 옥스퍼드 대학 졸업식 축사에서 단 세 마디만 했지만, 아직도 명연설로 많은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도 짧은 연설을 자주 했다.
2005년 울산에서 열린 제86회 전국체육대회
준비해간 축사에는 “2010년까지 스포츠·레저산업을 세계 10위권으로 끌어올리겠다.”는 등의 장황한 비전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런데 막상 현장에 가보니 야간 개회식에 열광하는 수 만 명의 청중과 선수단이 보였다.
과연 그들의 귀에 거창한 5년 후의 비전이 들릴까?
그런 얘기를 들을 준비도 되어 있지 않은 듯했고, 그런 말을 할 상황도 아니었다.

대통령은 즉석에서 이렇게 연설하고 끝냈다.
“선수단 여러분, 최선을 다하십시오. 정정당당하게 승부하십시오. 그러면 모두 승리자가 될 것입니다.”
이 짧은 연설 안에 대통령은 당시 정치권과 경제계에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까지 담았다.
지루하고 긴 연설을 예상했던 청중들의 반응이 뜨거웠던 것은 물론이다.

2005년 제60회 경찰의 날 축하행사 자리
환갑을 맞은 터라 야외에서 성대한 축하행사가 계획됐다.
그런데 갑작스레 폭우가 쏟아졌다.
위험을 무릅쓰고 시범을 보인 여경들이 추위에 떨고 있었다.

대통령의 연설 차례가 됐다.
역시 60주년인지라 경찰에 대한 당부를 담은 긴 연설이 준비되어 있었다.
그러나 대통령은 원고를 덮었다.
그리고 말했다.
“경찰관이라는 사실이 큰 자랑과 긍지가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지원하겠습니다. 국민 여러분, 우리 경찰에게 힘찬 응원의 박수를 보냅시다. 경찰의 날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어떤 긴 연설보다 경찰에 대한 대통령의 따뜻한 애정이 녹아있었다.

이에 반해 김대중 대통령은 긴 연설을 선호했다.
그것이 국민에 대한 성의이자 예의라고 생각했다.
정책 등에 대해 첫째, 둘째, 셋째…하는 식으로 소상하게 설명하는 쪽을 택했다.

어느 쪽이 더 좋은 연설인지, 우열이 있을 수 없다.
수사학의 대가인 키케로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글은 쓰는 사람의 스타일에 따라, 글의 성격에 따라, 그리고 글을 읽는 대상이 기대하는 바에 따라 길 수도 짧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 한 가지는 있다.
군더더기가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글을 쓸 때는 더 넣을 것이 없나를 고민하기보다는 더 뺄 것이 없는지를 한 번 더 생각해봐야 한다.

더 이상 뺄 것이 없는 글이 좋은 글이다.
군살은 사람에게만 좋지 않은 게 아니다.

강원국 (라이팅 컨설턴트, 객원 필진)

2 Responses to [두 대통령과 함께한 전략적 글쓰기 4] 뺄 것이 없을 때까지 줄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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