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대통령과 함께한 전략적 글쓰기 7] 글을 여러 사람에게 보여라

글을 혼자 쓸 필요는 없다.
– 청와대 독회제도

‘디캔팅’이라는 것이 있다.
와인에 가라앉은 찌꺼기를 제거하고, 고유의 향을 살려내는 과정이다.
글 쓰는 과정에도 이런 디캔팅이 필요하다.
자기가 쓰고 있는 글에 대해 주변 사람에게 얘기하고, 또 그들의 의견을 듣는 것이 바로 글쓰기의 디캔팅 과정이다.

청와대에도 연설문을 비롯해 글과 관련하여 이런 과정이 있다.
바로 독회(讀會)란 것이다.
일종 글 검토 회의다.

김대중 대통령은 광복절, 국민과의 대화 등 비중 있는 몇몇 행사에서만 이를 가동했다.
참석 범위도 수석비서관급 이상으로 제한됐다.
참석자들은 미리 글을 읽어본 후 자신의 의견을 가지고 올라갔다.
대통령과 토론을 하지는 않았다.
참석자가 얘기하고 대통령은 들었다.
어떤 주제에도 본인 의견이 있는 대통령이지만 듣기만 했다.
대통령은 아무리 하찮은 의견도 경청했다.
그리고 얘기하는 사람이 오락가락하면 그 내용을 정리해줄 정도로 핵심을 더 잘 파악했다.

언젠가 대통령은 대화가 틀어지는 세 가지 경우를 얘기했다.
첫째는 상대방 의견을 무시하는 것이고,
둘째는 자기 혼자 결론을 다 내버리는 것이며,
셋째는 자기 자랑만 늘어놓는 것이다.

아무튼 김대중 대통령은 잘 들었다.
간혹 추임새만 넣어줬다.
말하는 사람의 긴장을 풀어주기 위한 배려이다.
“그렇지요? 예~ 내 생각도 그래요.”
이 정도의 대통령 반응을 얻으면 최상이다.
그러기 위해 해당 수석실의 비서관, 행정관까지 동원되었다.
해당 부처로부터 자료를 받아 수석 주재로 철저한 준비회의를 했다.

글을 쓰는 데 있어서는 남의 말을 듣는 것이 중요하다.
스스로 중심만 잡을 수 있으면 많이 들을수록 좋다.
많은 얘기를 들어야 좋은 글을 쓸 수 있는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 역시 독회를 했다.
주로 토론하는 방식이었다.
참석자도 글과 관계되는 사람은 행정관까지 다 불렀다.
대통령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야 글도 잘 쓸 수 있다고 생각했다.

대통령이 얘기를 주도했다.
대통령은 얘기를 하면서 새로운 생각을 떠올렸다.
말이 말을 가져오다 보니 예정된 회의시간을 훌쩍 넘기기 일쑤였다.
우리는 어디서 저런 생각이 마르지 않는 샘처럼 끊임없이 나올까 궁금했다.

연설비서실 자체적으로도 독회라는 것을 했다.
국민의 정부에서는 고도원 씨가 연설비서관이었는데, 중요한 연설이 아니면 같이 모여서 머리를 맞대지는 않았다.
담당 행정관이 초안을 써서 비서관에게 보고하면 비서관이 손을 봐서 대통령께 보고했다.
그러니까 비서관과 행정관이 일대 다 대응으로 일을 했다.

그러다 보니 의도하지 않게 행정관 간에 경쟁도 됐다.
어느 행정관 초안은 비서관이 쉽게 오케이를 하고, 어느 행정관 글은 다시 쓰라는 소리를 들으면 꽤 스트레스를 받았다.

참여정부 연설비서실에서는 모여서 같이 썼다.
집단집필이라고 할까?

물론 초안은 담당 행정관이 쓴다.
그러나 이것은 그야말로 초안일 뿐이다.
비서관과 모든 행정관이 독회 테이블에 앉는다.
PC 모니터를 함께 보면서 초안을 쓴 행정관이 한 줄씩 읽어나간다.
고치고 싶은 부분이 있으면 누구나 기탄없이 얘기한다.
비서관의 역할은 이 회의의 사회 정도이다.
결정이 필요할 때에만 비서관이 나선다.
서로 의견이 다를 때 누군가는 어느 한 쪽 손을 들어줘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독회제도의 장점은 하나둘이 아니다.

첫째, 완성도가 높아진다.
토론을 통해 서로의 생각이 섞이고, 대화를 주고받으면서 생각이 발전한다.
다른 사람의 의견을 들으면서 새로운 생각이 떠올라 그것이 연설문에 반영된다.
여러 사람이 함께 보니 작은 오류도 잘 잡힌다.
그러다 보니 삼베옷이 독회를 거치고 나면 비단옷이 된다.

둘째, 스트레스를 줄일 수 있다.
글쓰기는 스트레스다.
남보다 더 잘 써야 한다는 경쟁 관계에서는 더욱 그렇다.
서로 힘을 모으는 연대 관계로 바꾸면 스트레스를 확실히 줄일 수 있다.
우선, 대통령으로부터 꾸중을 들었을 경우 충격이 덜하다.
모두의 합작품이니까.
대통령의 꾸중은 아무리 사소한 것일지라도 당사자 입장에서는 결코 가볍지 않다.
반대로 칭찬을 받았을 때는 모두가 함께 기뻐할 수 있다.
대통령 연설문은 쓰는 것도 고역이지만, 대통령의 평가가 더 큰 스트레스인데, 그것이 훨씬 덜한 것이다.

셋째, 초안을 쓰는 부담이 적다.
독회에서 걸러주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초안을 대충 쓰지는 않는다.
오히려 더 신경을 쓴다.
초안이 좋지 않을 경우에는 독회시간이 길어진다.
그것은 동료들에게 미안한 일이 된다.
그러니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더 열심히 초안을 쓴다.
또한 다른 사람의 도움으로 자기 초안이 좋아지면, 그 다음에는 자기도 도움을 주기 위해 더 노력한다.
독회 전에 미리 초안을 보고 충분히 고민한 후 회의에 참석하게 된다.

넷째, 톤이 균질해진다.
대통령 연설문은 쓰는 사람에 따라 달라져선 안 된다.
이 연설 저 연설이 달라도 곤란하다.
하지만 독회를 거치고 나면 초안을 쓴 사람이 누구이건 간에, 누가 봐도 노무현 대통령의 연설문으로 거듭나게 된다.

다섯째, 교육이 된다.
잘 쓴 사람의 글을 보면서, 또 함께 고치면서 어떻게 글을 써야 하는지를 배우게 된다.
그런 결과로 연설비서실 행정관들의 수준이 같이 올라간다.
협업 과정에서 모두의 역량이 향상되는 것이다.

글은 꼭 혼자 쓸 필요 없다.
참여정부 연설비서실의 독회제도를 자기가 몸담고 있는 조직에서 활용해 보는 것도 괜찮을 듯싶다.
그게 귀찮다면 적어도 주변 사람 글을 보여줘라.
글은 여러 사람에게 보일수록 좋아진다.

강원국

2 Responses to [두 대통령과 함께한 전략적 글쓰기 7] 글을 여러 사람에게 보여라

  1. Pingback: 청와대의 독회제도 참좋네 | hyosuk

  2. Pingback: 강원국의 ‘두 대통령과 함께 한 전략적 글쓰기’를 마치며 | Aca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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