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대통령과 함께한 전략적 글쓰기 14] 인수위원회 시절, 2개의 연설문

“강 국장 어딨나?”
– 인수위원회에서 글쓰기 50일

제16대 대통령 선거가 끝나고 윤태영 당선인 연설팀장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곧바로 꾸려질 인수위원회에 와서 당선인 연설문 작성을 지원해달라는 주문이었다.
박지원 대통령 비서실장에게 인수위 파견 발령 인사를 하러 갔다.
박 실장은 내게 한 마디만 당부했다.
“국민의 정부 청와대 직원의 명예를 걸고 성공적으로 지원 업무를 하고 돌아오라.”
막중한 사명(?)을 띠고 2002년 12월 30일 지금의 외교부 건물에 입주한 인수위 사무실로 첫 출근을 했다.
명함이 당선인 비서실 비서로 찍혔다.
인수위 첫날 출범식이 있었다.
노무현 당선인이 여러 얘기를 했지만 한 가지만 기억난다.
낭중지추!
“낭중지추란 말이 있지요? 역량이 있는 사람은 눈에 띄려고 애쓰지 않아도 언젠가 눈에 띄게 되어 있습니다.”
그 뒤로 인수위가 해단식을 한 2월 21일까지 50여 일간 나는 당선인의 눈에 한 번도 띄지 못했다.

당선인 매일 두세 개, 많을 때는 서너 개의 일정을 소화했다.
일정마다 연설문 또는 말씀자료가 필요했다.
대통령 비서실에서는 비서관 포함하여 다섯 명이 대통령의 연설이나 말씀자료를 준비한다.
하지만 당선인 비서실에서는 단 두 명이 이 일을 해야 했다.
그에 반해 온 나라가 당선인의 입만 쳐다볼 즈음이었다.
당선인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대통령의 그것보다 주목도가 높을 때였다.
그러니 그것을 준비하는 사람은 얼마나 중압감을 느꼈겠는가.
집에 들어간 날은 열 손가락에 셀 정도였다.
대부분의 날은 집에 가지 못했다.
한겨울 새벽, 책상 위에서 잠깐 눈을 붙이면 경호실의 폭발물 감지견이 와서 깨웠다.
하루하루가 악전고투였다.
그러나 몸이 피곤한 것은 참을 만했다.
당선인의 외면이 힘들었다.
단 한 번도 내가 작성한 원고를 읽지 않았다.
참고조차 하지 않았다.
심지어 가타부타 말도 없었다.
무엇이 잘못 되었으니 이렇게 고쳐서 작성해달라는 말씀도 없었다.

나는 떠날 준비를 했다.
인수위까지만 마치고 청와대를 떠나려고 마음먹었다.
도움이 되지 않는 참모는 떠나는 게 당연했다.
그리고 김대중 대통령께 죄송한 마음도 들었다.
박지원 실장이 당부한 국민의 정부 명예를 망가뜨리고 있었다.

어느 쪽으로나 더 이상 폐를 끼치지 말아야지.
그런 생각을 하며 인수위의 어두운 터널이 다 지나갈 무렵.
어느 날 갑자기 당선인이 예정에 없던 한미연합사를 방문하게 되었다.
연설문을 작성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황급히 써서 보고했다.
당선인이 그날 처음으로 내가 쓴 연설문을 읽었다.

그래도 하나는 건졌으니 다행이다.
이것을 보람으로 여기고 떠나자 생각했다.
아, 그리고 또 하나
2003년 2월 21일 해단식에서 당선인과 독사진을 찍는 영광을 챙기고 인수위 근무를 마쳤다.

그런데 반전이 있었다.
당선인이 취임식 한 다음날 청와대 비서실을 한 바퀴 돌면서 연설비서실에 와서 나를 찾은 것이다.
“강 국장 어딨나?”
당시에는 행정관으로서 직급이 국장이었다.
쭈뼛거리며 나가니 대통령이 얘기했다.
“나는 미처 생각도 않고 있었는데… 글이 좋았어.”
대통령은 취임식 당일에 있었던 오찬사, 만찬사 얘기를 하고 있었다.

인수위 시절에는 온통 취임사에 집중하게 된다.
취임사 준비위원회가 만들어지는 것은 물론, 당선인이 직접 몇 차례씩 회의를 주재했다.
하지만 취임식 당일 오찬과 만찬에 있는 연설문은 챙기지 않았다.
오찬에는 내로라하는 국내 인사를, 만찬에는 취임 축하를 위해 방한한 정상급 외빈에게 연설을 해야 하는 시간이 있었다.
인수위에서 틈틈이 준비해 놓았는데, 이 두 가지 연설문이 마음이 들었던가 보다.
아무튼 이 두 개의 연설문으로 인해 청와대를 나가겠다는 생각은 접게 되었다.

강원국 (라이팅 컨설턴트, 객원 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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