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대통령과 함께한 전략적 글쓰기 16] ‘대통령 스피치라이터’란 자리

보이지 않는 유령이 되어라
– 대통령 스피치라이터

스피치라이터.
우리말이 있으면 좋은데 딱히 없다.
연설문 대필자? 연설 작가? 좀 이상하다.
그냥 스피치라이터가 좋겠다.

대통령 스피치라이터는 보람 있는 자리다.
대통령의 시간을 절약해주는 일을 하기 때문이다.
청와대 모든 참모들이 이런 일을 하지만, 다른 참모들이 만든 일의 결과물은 대통령이 참고만 할뿐이다.
연설문은 대통령이 직접 보고 읽어야 한다.
본인 것이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통과할 수가 없다.
마음에 들 때까지 대통령의 시간적 부담을 덜어주는 게 스피치라이터 임무다.

대통령 스피치라이터의 조건은 무엇일까?
거두절미하고 얘기하면, 고스트 라이터(Ghost Writer)가 되어야 한다.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

노무현 대통령께서 이런 말을 했다.
“이건 내 연설문이 아니야.”
스피치라이터에게 너무나 치명적인 지적이다.

자기를 버려야 한다.
스피치라이터에게는 ‘내’가 없다.
언젠가 어느 고위 공무원이 ‘공무원에겐 영혼이 없다’고 해서 화제가 된 적이 있는데, 스피치라이터야말로 영혼이 있어선 안 된다.

대신에 연설하는 사람에 빠져 살아야 한다.
그 사람에게 빙의되어야 한다.
그 사람의 아바타가 되어야 한다.
연설 현장에 가면 그분은 어떤 생각, 무슨 말을 할까?
그것만 생각해야 한다.
그 사람의 논리 전개 방식과 고유의 표현 방식, 어투나 호흡, 즐겨 쓰는 용어와 농담까지 철저하게 따라가야 한다.
그래서 특유의 개성과 색깔이 드러나도록 해야 한다.
누가 봐도 이 연설문은 그 사람의 것이라는 생각이 들게 해야 하는 것이다.

연설문을 쓰면 김 대통령 연설문은 호남 출신 행정관이, 노 대통령 연설문은 부산 출신 행정관이 어투까지 흉내 내면서 몇 번씩 읽어봤다.
김대중 대통령은 ‘그리하여’, ‘~해마지 않습니다’, ‘말하자면’ 같은 표현을 자주 썼다.
노 대통령 역시 자주 쓰는 단어들이 있었다.
예를 들어 ‘더 이상’은 늘 ‘이상 더’라고 써야 한다.
연설문에 ‘더 이상’으로 써놓아도 대통령은 ‘이상 더’라고 읽었다.
이런 표현이 많다.
연설비서실은 각자 책상에 붙여놓고 가급적이면 대통령이 자주 쓰는 단어를 썼다.
자신을 드러내는 순간, 그는 이상 더 스피치라이터가 아니다.

2007년 신년 기자회견 연설문
1월말, 대통령 신년연설이 있었다.
그리고 며칠 후 신년 기자회견을 갖게 되어 있었다.

기자회견이 있을 때마다 모두말씀이란 게 있다.
김대중 대통령 때에는 일 년 중 가장 큰 연설문이 두 개였다.
연두기자회견 모두말씀과 광복절 경축사.
노 대통령 때부터는 대통령 신년연설이 생겨 기자회견은 기자들과의 질의응답에 초점이 맞춰졌다.

그래서였다.
대통령께서 며칠 전에 있었던 신년연설에 많은 얘기를 했으니,
거기에서 빠진 얘기만 넣어 간략하게 작성해달라고 전화로 지시했다.
정말 간략하게 작성해 보고했다.
행사 당일 아침 대통령은 대노했다.
내가 대통령의 뜻을 잘못 읽은 것이다.
‘간략하게’의 의미를 내 편한 대로 해석한 것이다.
스피치라이터로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쯤에서 내가 고스트 라이터를 하게 된 배경에 대해 고백을 하는 게 좋을 것 같다.
나는 여러 사람 앞에서 말하는 게 심각할 정도로 부담스럽다.
대학 4학년 때, 논문을 발표해야 졸업할 수 있었다.
학우들 앞에서 발표할 용기가 도무지 나지 않았다.
발표하는 날 아침, 병에 술을 한 통 담아왔다.
내 차례가 되기 직전에 화장실에 가서 벌컥 마셨다.
시간이 지날수록 취기가 올랐지만 떨리지는 않았다.

청와대에 들어가기 직전, 대우그룹에서 마지막 직급은 과장이었다.
하지만 차장으로 대우 생활을 마칠 수 있었다.
차장 진급이 내정이 된 상태에서 승진자 교육에 들어가지 않고 미뤘다.
교육 과정 중에 3분 스피치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어느 날 대우그룹 회장비서실이 해체를 맞았다.

스피치라이터의 두 번째 조건은 잘 알아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말귀를 알아먹어야 한다.
알아듣는 게 쉬운 것 같아도 그렇지 않다.
대통령의 구술을 함께 들어도 열이면 열 모두 해석이 다르다.
그 중에 분명 답이 있기는 한데, 아무튼 서로 다른 얘기를 한다.
“대통령은 이런 말씀을 하고 싶은 거야.”
“이 말을 꺼내고자 하는 대통령의 의도는 이것이야.”
십인십색이다.

모르면 물어봐야 한다.
대충 깔아뭉개고 앉아서 쓸 일이 아니다.
필요하면 다시 구술을 해달라고 요청해야 한다.
노무현 대통령은 스피치라이터를 집무실 옆방으로 불렀다.
청와대 역사에서 처음으로 연설비서관이 본관에 위치하게 된 것이다.
처음 이사한 날, 대통령께서 연설비서관실에 왔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는 우리에게 대통령은 차도 한 잔 안주냐며 경직된 분위기를 누그러뜨렸다.
냉장고에 있는 콜라 한 잔을 따라드렸다.
대선 유세 때, ‘청와대 복도에서 참모들과 어깨 툭 치며 인사하는 대통령이 되고 싶다’고 한 얘기가 빈말이 아니었구나 생각했다.

김대중 대통령과 업무적으로 만나는 기회는 영상메시지 녹화 때 뿐이었다.
모든 것은 필문필답이고, 구두로 받는 코멘트는 부속실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들었다.
영상메시지는 대통령이 직접 현장에 가지 못하는 경우에 녹화를 해서 보내는 연설 대용이다.
그런 영상메시지가 한 달에 서너 건은 됐다.
일정을 잡아 한 번에 두 건 정도를 녹화하는데, 해당 메시지 초안을 작성한 행정관이 배석하게 되어 있다.

그밖에 스피치라이터로서 조건이 한두 가지 더 있을 수 있다.
몸이 튼튼해야 하고, 약간의 순발력이 있으면 금상첨화다.
간혹 번갯불에 콩 구워먹듯이 연설문을 써야 하는 때도 있어서 그렇다.
김선일 씨 테러사건과 관련하여 담화문을 써야 하는 경우가 그랬다.
새벽에 연락을 받고 사무실에 나와 곧장 써서 대통령께 보고해야 했다.
이런 때는 애간장이 탄다.

스피치라이터는 단순히 연설문만 쓰지는 않는다.
연설문을 쓰는 과정에서 대통령에게 들은 내용 중에 다른 비서실에서 알아야 할 것은 해당 부문에 알려주는 통로 역할도 한다.
연설문에서 ‘무엇을 하겠다’고 대통령이 언급했는데, 해당 부처에서 액션플랜을 갖고 있지 않으면 낭패이기 때문이다.
‘올해의 3대 목표, 5대 과제’ 이런 식으로 묶어 새로운 슬로건을 만들어주는 것도 스피치라이터의 몫이 되기도 한다.
대통령의 입을 통해 발표되면 그것이 곧 목표와 과제가 된다.

하지만 스피치라이터는 메시지의 내용을 만드는 사람은 아니다.
그것은 정책 담당자의 몫이다.
다만, 그것을 설득력 있게 전달하는 것이 스피치라이터의 역할이다.
그런데 간혹 내용까지 만들어내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실제 그렇게 해보려는 스피치라이터도 있다.
그것은 착각이다.

대통령 스피치라이터는 힘들기만 한 것은 아니다.
얻는 것도 많다.
무엇보다 ‘대통령’이라는 시대의 거인에게 배울 수 있다.
대통령의 생각을 연설문 쓸 때처럼 제대로 배울 기회는 없다.

스피치라이터는 자부심도 크다.
대통령의 생각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잘 안다는 자부심이다.
연설비서실은 늘 대통령의 최근 생각을 쫓는다.
각종 행사나 회의, 혹은 식사자리에서 대통령이 하는 한마디 한마디를 챙겨서 쫓아가야 한다.
이것이 연설문 쓰는 것만큼 중요하다.
아니, 이것을 잘하면 연설문은 거저 써진다.

기업이나 단체에서도 CEO의 말을 따라가는 담당자를 둘 필요가 있다.
CEO도 결국은 말로 경영을 하기 때문이다.

대통령 연설문은 해당 부처와 각종 위원회 등에서 초안을 받는다.
글 자체로선 매우 훌륭하다.
그러나 다시 써야 한다.
기본적인 정보만 취하고 대통령의 생각으로 새로 써야 한다.

이 세상에 글을 잘 쓰는 사람, 생각이 뛰어난 사람은 많다.
하지만 김대중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의 연설문을 쓸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다.
매일 매일 이분들의 생각을 쫓아간 사람만 쓸 수 있다.
그러니 스피치라이터는 글을 잘 쓰는 사람이 아니다.
생각이 많은 사람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런 사람일수록 자기의 생각으로 자기 글을 쓰려고 하기 때문이다.
노 대통령은 유시민 전 장관을 비롯해 내로라하는 문필가들에게 의견을 구하고 연설문 초안을 받아보기도 했다.
그것은 김 대통령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단 한 번도 채택된 적이 없다.
자신의 연설문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강원국 (라이팅 컨설턴트, 객원 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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