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대통령과 함께한 전략적 글쓰기 17] 시간과 노력을 들여라

손녀뻘 되는 비서 앞에서 연습하는 대통령
– 성실함과 준비성이 글쓰기의 기본

두 대통령의 글쓰기 특징은 성실하게 미리 준비한다는 점이다.

“글은 머리로 쓰는 게 아니라 엉덩이로 쓰는 것입니다.”
노무현 대통령의 말이다.
그만큼 시간과 노력이 들어가야 나오는 게 글이란 얘기다.

성실과 근면을 유독 강조하고 본인 스스로 그 모범이 되었던 김대중 대통령.
역대 대통령 가운데 연설문 작성에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한 대통령이었다.

두 대통령은 글을 빨리 쓰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꾹꾹 눌러쓰는 타입이라고 할까?
그렇게 글을 많이 쓰고, 글쓰기의 달인이면서도 글 쓰는 것을 힘들어 했다.

특히 노무현 대통령은 허리가 좋지 않아 오랫동안 책상에 앉아 글을 쓰는 것이 쉽지 않았다.
언젠가 이런 얘기도 했다.
“말로는 글이 잘 써지는데 손으로 쓰려면 힘이 들어요.”
그렇다고 일필휘지가 안 되는 건 아니다.
급하면 급한 대로 뚝딱 글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그중에서도 좋은 카피를 만드는 데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물론 이 또한 성실함의 결과이다.
평소 그 주제에 대해 골똘하게 고민한 것이 어느 순간 한 줄의 명카피로 툭 튀어나온 것이다.

김대중 대통령 역시 조어의 천재였다.
정곡을 찌르는 한 마디를 찾아냈다.
우리 모두가 잘 아는 ‘철의 실크로드’, ‘햇볕정책’, ‘행동하는 양심’이 모두 김 대통령의 작품이다.

이 모든 것은 준비 없이 되는 일이 아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일 년 동안 해야 할 주요 연설에 대해 연초부터 생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농부가 일 년 농사 계획을 짜듯이 멀리 내다보고 큰 틀에서 메시지를 배분했다.
연설비서실에 그렇게 구상한 내용이 메모로 전해지기도 했다.
“올해 4.19에는 이런 얘기를, 5.18에는 이런 메시지를 내보내면 어떨까요?”
그것은 3.1절, 광복절 등 주요 기념일이 다가올 때도 마찬가지였다.
어느 참모보다 먼저 머릿속으로 연설문을 쓰기 시작했다.
2006년 광복절을 두 달 가까이 앞둔 어느 날, 연설비서실은 미처 생각도 못하고 있는데, 부속실에서 연락이 왔다.
“다음 주 수석보좌관회의에서 돌아오는 광복절 경축사에 어떤 메시지를 담을 것인지 토론하겠다고 하십니다. 연설비서관이 발제를 하라고 하셨습니다.”
대통령은 그 바쁜 와중에서도 참모들보다 먼저 생각하고 먼저 준비했다.

노 대통령은 임기가 끝나갈 무렵 책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회고록이 아니었다.
재임 때의 경험을 글로 남겨 후일에 참고가 되었으면 했다.
성공만이 아니라 실패의 기록을 남기고자 했다.
몇몇 비서관이 이 일을 돕는 일에 참여했다.
회의를 할 때마다 대통령이 발제하고 토론을 주도했다.
그리고 숙제를 내줬다.
하지만 다음 회의 때 만나면 가장 성실하게 숙제를 해온 사람은 늘 대통령이었다.

김대중 대통령은 더 철저하게 준비했다.
세세한 부분까지 꼼꼼하게 챙겼다.

먼저, 의견부터 듣기 시작했다.
광복절 연설의 경우, 전 부처와 각종 위원회에서 보고서가 올라왔다.
청와대 안팎의 사람들을 모아 식사를 하면서 직접 청취하기도 했다.
국민들이 듣고 싶은 내용이 무엇인지 확인하고자 했다.
어느 한쪽의 얘기만 듣는 것도 경계했다.
진보 쪽 얘기를 들으면 보수진영의 얘기도 들어 균형을 잡으려고 했다.

그런 후 각종 자료를 검토했다.
공보수석실에서도 많은 참고자료가 올라갔다.
대통령은 어느 것 하나 그냥 지나치는 법 없이 모두 읽었다.
괜찮다 싶은 내용은 따로 놔뒀다가 다시 읽었다.

또한 사람을 만나고 자료를 읽으면서 틈틈이 메모를 했다.
재임 중 여러 계기에서 발언할 내용을 적은 노트가 무려 27권이나 됐다고 하니, 일 년에 다섯 권 이상의 메모를 하면서 자신이 할 말을 미리 준비한 셈이다.

이런 요지 정리를 통해 머릿속에 얼개가 서면 비로소 집필에 들어간다.
각고의 시간 끝에 연설문이 완성되면 직접 서서 읽어본다.
그저 한번 읽어보고 끝내는 것이 아니라 입에 완전히 붙을 때까지 읽고 또 읽었다.
혼자 해보기도 하지만, 어떤 때는 이희호 여사를 앞에 두고, 또 어느 때는 손녀처럼 생각했던 관저 비서팀의 장옥추 씨에게 들어보라며 연설을 했다.
그러다가 더 좋은 표현이 생각하면 수정한다.
글을 쓰는 시간보다 이렇게 퇴고하는 시간이 더 걸릴 만큼 철두철미하게 준비했다.

손녀뻘 되는 비서 앞에서 연설을 해 보이는 일흔의 대통령을 머릿속에 그려보라.
정말 멋있지 않은가.

다시 노무현 대통령의 신년연설에 얽힌 이야기 두 토막
2006년 1월 신년연설
연설 시간이 40분으로 정해졌다.
대통령은 “신년연설에 뭘 담지?”란 질문을 시작으로 다섯 차례에 걸쳐 15시간 동안 연설문 내용을 구술했다.
대통령이 검토한 자료만 해도 A4 용지 500장 분량.

2007년 1월 임기 마지막 신년연설
대통령은 대한민국이 지금 어디에 서 있으며, 어디로 가야 하는지 충정 어린 고언을 하고 싶었다.
그래서 오랫동안 준비했다.
대통령은 두툼한 책 한 권을 들고 생중계 카메라 앞에 섰다.
다 읽으려면 2시간이 넘는 분량의 원고였다.
시간을 맞추기 위해 원고 중간 중간에 경과 시간 표시를 해두었다.
그러나 대통령은 한 마디 한 마디를 건너 뛸 수가 없었다.
오히려 원고에 없는 내용도 추가할 정도로, 하고 싶은 말, 꼭 해야 할 말이 많았다.
결과는 안 좋았다.
대통령 스스로 ‘페이스를 잃었다’고 할 정도로 시간 조절에 실패했다.
준비 안 된 연설이라는 질타가 쏟아졌다.
하지만 대통령에겐 임기 중 가장 오랜 시간, 가장 심혈을 기울여 준비한 연설이었다.

강원국 (라이팅 컨설턴트, 객원 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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