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 리뷰] – 부조리한 사회에 살고 있다면, 당신도 공범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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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노예수입이 금지된 후 흑인납치가 만연해진 1840년대 미국, 납치된 후 12년간 노예로 살아야 했던 한 인간의 기록. 아카데미 작품상을 거머쥔 <노예 12년>은 이렇게 요약할 수 있다. 하지만 영화가 다루고 있는 내용의 특성상, 흑인 한 명의 이야기로 요약해버리는 것은 적절하지 않은 것 같다. 그래서 다시 요약해보려 한다.

“부조리한 사회에 살고 있다면, 당신도 공범자다.”

1. 미국사회의 근간 개신교 – 개인, 신과 만나다.

미국의 뿌리는 개신교인가? 글쎄, 그렇게 단정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그 역은 성립한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개신교는 미국의 뿌리다. 미국에 사는 개인은 성경의 가르침을 따르는 삶을 산다. <노예 12년>의 등장인물들 역시 그렇다. 노예제도가 나에게 더 비극적으로 다가온 이유 중 하나는 여기에 있었다. 노예제도가 지속될 수 있었던 것은 개개인이 선함을 저버리고 신의 가르침을 배반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들은 믿는 바대로 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예제는 지속됐다. 분명히 뭔가 잘못되어가고 있었지만 스스로 잘못했다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비극은 여기서 극대화됐다.

개신교는 종교개혁의 여파로 만들어졌다. 종교개혁의 골자는 라틴어로 되어 있던 성경을 다른 언어로 번역하고, 또 활자인쇄술을 사용해 여러 사람에게 퍼뜨릴 수 있었던 것에 있었다. 카톨릭이 개혁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된 주요 원인은 온갖 비리로 얼룩진 사제관계에 있었다. 신도는 사제의 말을 신의 말로 따랐다. 사제는 주교의 말을 신의 말로 알았다. 정점에 교황이 있었다. 교황의 말이 곧 신의 말이었다. 의심을 허하지 않는 절대권력이 존재하는 사회였다. 비리가 싹트기 딱 좋은 환경이었다.

종교개혁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직접 성경을 읽을 수 있게 됐다. 개신교는 개개인이 스스로 성경을 통해 신과 조우할 것을 독려했다.

<노예 12년>의 등장인물들은 자신만의 방법으로 신심 충만한 삶을 살았다. 문제는 그들이 각자 다른 신을 가지고 있었다는 데 있었다. 솔로몬의 ‘착한’ 주인 포드는 흑인노예에 비교적 관대했다. 엄마와 아이를 떨어뜨리지 않으려 애는 써봤으며, 똑똑한 노예 솔로몬에게 바이올린을 선물하기도 했다. 포드는 때때로 노예들을 모아놓고 그 앞에 서서 성경강독을 했다. 신의 말씀을 전파하는 데서 뿌듯함을 느꼈다. 그러나 그의 신은 솔로몬을 해방하는 데는 관여하지 않았다.

솔로몬이 만난 ‘나쁜’ 주인 엡스 역시 그만의 방법으로 신과 만났다. 처음 본 노예들을 앞에 두고 하는 말이 압권이다. “주(인)님의 말을 듣지 않는 자는 매를 많이 맞으리라.” 흑인 노예의 주인은 본인이기 때문에 본인의 말을 듣지 않으면 매질을 할 것이라는 협박이다. 이 말을, 성경을 손에 쥐고 신의 말을 빌어서 내뱉는다. 관객들은 소름이 돋을 만한 장면이지만 엡스는 실제로 그렇게 믿었을 것이다.

주인들만 그런 것도 아니다. 흑인 노예들도 자신들만의 신을 가지고 있다. 엡스에게 괴롭힘 당하던 어리고 예쁜 흑인노예 팻시가 솔로몬에게 ‘자신을 죽여달라’며 부탁하던 장면에서 엿볼 수 있다. 솔로몬은 팻시의 부탁에 놀라서 말한다. “나에게 어찌 신이 노할 행동을 하란 말이오.” 팻시는 대답한다. “(이런 상황이라면) 주님은 허락하실 거예요.”

2. 바뀌지 않을 것만 같은 노예제 사회에서 노예가 사는 법.

2-1 내가 저 노예보단 우월해.

노예가 행복해질 수 있는 길은, 노예로 살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날이 절대 오지 않을 것 같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절대적인 행복이 불가능하다면 상대적인 행복을 찾는 편이 개인에게 어쩌면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다. 내 옆의 노예보다 우월한 노예가 되는 것이다. 내 옆의 노예보다 더 주인에게 사랑받는 노예가 되는 것이다.

자신을 죽여달라고 할 만큼 괴로워했던 팻시는 주인에게 있어 ‘목화밭의 여왕’이었다. 노예 누구보다 목화를 잘 땄다. 팻시는 그 대가로 주말의 휴식을 얻었다. 주말에 팻시는 이웃집을 찾아 차를 마셨다. 차를 마실 때만큼은 우아하게 새끼손가락을 치켜 올렸다. 이때만큼은 차를 따라주는 또 다른 흑인노예보다 우월했다. 또 자유 시간에 팻시는 때때로 콧노래(!)를 부르며 인형을 만들었다.

원래 흑인노예의 관리인이었지만 노예로 전락한 한 백인에서도 이 행태는 엿보인다. 그는 흑인노예를 관리하는 것에 자책을 느껴 술독에 빠져 살았던 탓에 노예로 전락했다. 솔로몬은 그가 자신을 도와줄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그래서 자신의 편지를 좀 부쳐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그 백인은 주인에게 솔로몬을 밀고했다. 다시 관리인이 되고자 한 욕망 때문이었다. 관리인 생활이 괴로웠지만 자신보다 하등하다고 생각했던 흑인노예와 같은 지위가 되었다는 점이 그에게 더 고통스러웠던 것이다.

솔로몬 역시 여기에서 자유롭기는 어렵다. 솔로몬은 첫 번째 주인 포드의 신임을 얻자 그 생활에 만족한 듯한 느낌을 풍겼다. 포드는 솔로몬이 자유인이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솔로몬을 노예 이상으로 대우하면서도 절대 풀어주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솔로몬은, 다른 노예가 보기에, 안주한 듯 보였다.

2-2 자기세뇌 

“나쁜 사람은 아니네.
힘든 일 아닐세.”

흑인노예들이 목화솜을 따면서 불렀던 노동요가 의미심장하다. 맥락상 ‘주인’이 나쁜 사람이 아니며, ‘목화솜을 따는 일’이 힘들지 않다는 뜻으로 들린다.

흑인노예의 입장에서 주인은 나쁜 사람이다. 상대적으로 흑인노예는 덜 나쁜, 혹은 좋은 사람으로 포지션된다. 신이 벌하셔야만 하는 나쁜 사람이 자신들을 괴롭힌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은 너무도 힘들 것이다. 그 때 흑인노예들이 할 수 있는 선택은 크게 두 가지다. 자신들의 힘으로 나쁜 주인을 이기거나, 나쁜 주인이 사실 그렇게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해버리는 것이다. 전자는 불가능하니 그들이 택할 수 있는 선택은 후자밖에는 없다.

2-3 희망 없는 세상에서 희망 찾기. 

<노예 12년>에는 흑인들이 춤추는 장면이 자주 등장한다. 특히 엡스의 흑인노예들은 때때로 춤을 춰야만 했다. 술에 취하면 엡스가 그들을 불러내 억지로 춤추게 시키기 때문이다.
극중에서 흑인노예들이 진심으로 춤을 추는 때는 노예 에드워드의 장례식이다. 그들은 정말 장례식에서 리듬을 타며 노래했다.

“요단강아 흘러라(Roll jordan roll). 죽으면 천국에 갈 거야. 요단강아 흘러라.”

잘못된 세상을 버틸 수 있는 것은 죽으면 이상화된 세상(천국)이 기다리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었다. 희망이 없는 세상에서 살 수 있는 방법은, 희망을 발견해내는 것이다.

3. 외부인의 은유

결국 솔로몬은 노예생활 12년 만에 구출된다. 솔로몬을 만난 한 ‘캐나다인’ 베스가 솔로몬의 상황을 솔로몬의 지인에게 전달했던 덕분이다.

결국 미국의 시스템 바깥에 있었던, 외부인만이 미국의 시스템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던 것이라고 해석해도 부족하지 않을 것이다. 1에서 언급한 것처럼 노예제는 어느 특정한 사람의 잘못 때문에 지속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노예제라는 시스템 하에 사는 사람들이 이미 노예제 시스템의 일부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 탓에 개인의 선함과 악함에 관계없이 내부 사람은 아무런 변화도 만들어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 많은 개개인들을 두둔할 수는 없다. 시스템 상의 악행에 시스템 하의 모두는 공범자다. 

솔로몬은 결국 노예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결코 해피엔딩은 아니다.
‘우연’과 ‘외부인’은 기가 막힌 행운을 만들어냈지만 결코 시스템을 바꿀 수 없었기 때문이다. 구출되지 못 한 노예들이 남아 있는 결말은 비극이다.

진정한 변화 혹은 진정한 해피엔딩은 결국 ‘필연’과 ‘내부인’에게서 도출될 수밖에 없다. 솔로몬이 구출되고 8년이 지나 노예제는 폐지됐다. 링컨, 그리고 링컨과 함께 한 사람들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노예제를 폐지하기 위해 애썼다. (영화 <링컨>을 추천한다.)

솔로몬이 구출되고 8년 후 노예제 폐지를 주장했던 에이브러햄 링컨이 미국의 대통령으로 당선되었고, 남북전쟁을 거쳐 결국 노예제는 폐지됐다. 링컨, 그리고 링컨과 함께한 사람들은 노예제가 존재하는 기존 시스템을 바꾸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노예제 폐지는 우연히 얻어진 것이 아니었다. 필연적인 결과였다. 링컨의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영화 ‘링컨(2013)’을 추천한다.

김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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