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채홍의 디자인커뮤니케이션 31] 평범한 사람들이 들려주는 소박하지만 특별한 이야기.

 

book01

1.

괜찮은 잡지를 하나 발견했다. 소규모 책방에서 파는 소규모 출판물이다. 잡지 제목은 <그랜드매거진 할>. 표지에 ‘할’ 한 글자가 날카롭게 시선을 붙잡는다. 표지 한가운데 떡 버티고 서서 뭔가 할 말 있다는 표정이다. 글자 한 자가 가진 에너지가 대단하다. B급 정서가 엿보이는 복고풍 글자체 제호와 오른쪽 아래 평범한 명조 글자체 ‘멋’이 기이한 대비를 이루고 있다. 어색한 느낌이 역력하지만 강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도대체 뭔 잡지야?’

“<그랜드매거진 할>은 memories can’t wait이라는 슬로건 아래 평범한 그랜드세대의 소박하지만 특별한 이야기를 수집합니다. 누군가의 할아버지 할머니로만 머물기엔 여전히 할 말도 많고 할 일도 많은 그랜드세대. 그들의 이야기는 군대에서 축구한 이야기보다 비장하고, 지나간 옛사랑의 편지만큼이나 아련하며, 주말드라마 예고편보다 더 두근두근합니다. <그랜드매거진 할>은 수많은 당신과 그들의 이야기를 나누고자 합니다. 또한 그들처럼 ‘그랜드’한 이야기를 만들어가고 있는 당신의 인생을 지지합니다.”

책 날개에 이렇게 쓰여있는 걸 보고 잡지 제호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다. 할머니·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다루는 잡지다!

book02

2.

<그랜드매거진 할> 창간호 주제는 ‘멋’이다. Tailor 황재홍, Hairdresser 권인숙, Shoemaker 심복석, Model 허미숙, Singer 차도균. ‘멋’과 연관된 일을 하는 사람 다섯의 인생역정을 담담하게, 때로는 드라마틱하게 들려준다. 묻고 답하는 인터뷰 형식이 아니라 그냥 곁에서 술술 풀어내는 말을 옮기듯 써놓았다.

– 우리 업계 사람들이 모이면 아직도 “저 사람이 3만 원 가지고 양복점 차린 사람이야”라고 수군대요. 근데 지금도 맨몸이 되면 나는 다시 그럴 수 있는 사람이에요. 그게 꼭 돈만 갖고서 하는 게 아니잖아요. 이젠 노하우라는 게 있으니까. 나한테는 실패가 준 능력이 있으니까요. 실패가 준 능력은 이런 아주 사소하고 아주 특별한 것들이에요. 그 능력으로 나는 또 오늘을 살아요. 말하자면 나는 아주 멋지게 실패한 사람인 거예요.(황재홍 할아버지, 35쪽)

– 손님이 한 사람뿐이어도 만족해. 욕심 부려 봐. 내 몸만 상하지. 나 찾아오는 손님들은 이따금씩 머리 하고 가면서 내 손을 꼭 잡고 “나 죽을 때까지 해줘.” 그러셔. 그러면 내가 그러지. “아파서 누워 계시면 내가 찾아가서 머리 깎아드릴게. 걱정마세요. 머리만큼은 내가 지켜드릴께.” 그렇게 욕심 없이 사니까 괜찮아. 지금은 아이들도 다 커서 시집보냈잖아. 아이들 키울 때는 마음이 바빠. 다 벌어먹여야 하잖아. 애 낳고 키우는 건 맨땅에서도 헤엄쳐야 되고, 물속에서도 헤엄쳐야 되고 난관이 많거든. 재밌는 일도 많지. 이 애가 나중에 커서 어떻게 될까 기대할 수 있으니까. 이제는 그나마도 다 끝났어. 나 혼자 하루 세끼 꼬박 먹고, 너무 편하지.(권인숙 할머니, 53~55쪽)

– 늬들도 지금은 젊지만 눈 깜빡 두 번만 해봐. 금세 오십 대 되어 있을 걸. 앉아가지고 내 나이가 얼만가 세다 보면 어느새 오십 되어 있다니께. 그만큼 세월이 빨리 간다는 겨. 그러니까 젊을 때는 맘대로 살아. 개판으로 살아. 세상 구석구석 여긴 어떤가, 저긴 어떤가 구경은 다 해봐야 할 것 아녀. 실컷 다녀. 못 가볼 데가 어디 있어. 깜빵도 가봐. 거기 뭐 도둑이 들어, 불날 일이 있어. 때 되면 밥 주지, 재워 주지. 애인 못 만나 아쉬운 게 좀 흠이겠지만, 돌아보면 다 좋은 게 있는 법이라니께. 그러니까 누구 눈치 볼 것도 없어. 그냥 늬들 맘대로 살아. 그럼 좋아.(심복석 할아버지, 95쪽)

모두 곁에서 말하는듯 하다. 나중에 ‘멋’에 대한 자신만의 철학 한마디씩 근사하게 덧붙일 때쯤이면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직접 찾아가 들으면 며칠을 듣고, 수없이 샛길로 빠져나갔다 돌아오곤 했을 한 사람의 인생 이야기가 구수한 입담으로 잘 요약되어 있다고나 할까. 손에서 놓지 못하고 순식간에 읽게 하는 이야기다.

book03a

book03

book04

book06

3.

편집과 디자인이 이야기의 힘을 조금만 더 받쳐주었더라면 훨씬 좋았을 것이다. 그래도 책 만드는 이의 즐거움과 정성이 느껴지는 잡지다. 어떤 면에선 잡지라기보다 단행본에 더 가깝다. 잡지에선 잘 쓰지 않는 책 날개를 그것도 아주 넓게(그랜드하게) 만들어 넣은 걸 보면 은연중 한 권의 완결된 단행본으로도 보이길 바랐다는 걸 짐작할 수 있다.

<그랜드매거진 할>은 수없이 듣고 만든 책이다. 나이 든 분들의 평생 살아온 얘기를 이 정도로 풀어내려면 오랜 시간과 노력이 들었을 것이다. 어쩌면 낯설고 어색한 풍경이다. 젊은 사람들이 평범한 노인을 찾아가 살아온 얘기를 듣는 모습은. 얘기하는 사람에게도, 듣는 사람에게도 말이다. 그들 젊은이가 처음 무슨 생각으로 이 일을 시작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잡지 속엔 무심코 지나친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시 보게 만드는 힘이 있다. 나도 가졌고, 내 아버지·어머니도 가진 소박하지만 특별한 이야기.

서채홍

*유어마인드, 헬로인디북스, 1984 등 작은 서점에서 판다.

Leave a Reply

Fill in your details below or click an icon to log in:

WordPress.com Logo

You are commenting using your WordPress.com account. Log Out / Change )

Twitter picture

You are commenting using your Twitter account. Log Out / Change )

Facebook photo

You are commenting using your Facebook account. Log Out / Change )

Google+ photo

You are commenting using your Google+ account. Log Out / Change )

Connecting to %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