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T] 강천석 칼럼, ‘기억에 대한 禮儀’

061기억에대한예의
– 역사와 기억에 관한 훌륭한 칼럼입니다. 비오는 월요일 오후에 읽기 좋습니다.[강천석 칼럼] ‘기억에 대한 禮儀’ 입력 : 2013.05.24 23:14역사는 기억의 곳간이다. 역사가는 창고 안에 뒤죽박죽 흩어진 기억과 체험의 뭉치에 저마다의 의미를 찾아줘 질서를 세운다. 정치가들은 나라 진로를 재설정(再設定)할 때마다 기억의 곳간 속 묵은 과거를 꺼내 먼지를 털고 자신의 정치 목표를 합리화하는 수단으로 동원한다. 역사 사용법 수준의 높낮이에 따라 한 나라와 한 개인의 기품(氣品) 차이가 드러나기도 하고 들키고 싶지 않은 속내가 폭로되기도 한다.1992년 6월 28일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이 발칸전쟁의 한복판 세르비아 수도 사라예보를 불시(不時)에 방문했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선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가 ‘인종 청소’ ‘종교 청소’라는 구역질 나는 명분을 내걸고 벌이는 살육극(殺戮劇)의 포성(砲聲)이 울리고 있었다. 암(癌)과 투병하던 일흔여섯의 노(老)대통령은 세계 여론을 움직여 대량 학살의 참극(慘劇)에 브레이크를 걸어보려 했다. TV로 이 뉴스를 지켜보던 역사가 에릭 홉스봄의 입에선 ‘아…, 6월 28일…’하는 신음 같은 탄식이 새나왔다.

그때로부터 78년 전인 1914년 6월 28일 사라예보 네거리에서 벌어진 오스트리아 황태자 암살 사건을 떠올린 것이다. 이 암살사건은 몇 주일을 굴러가다 유럽 전체를 수천만명의 목숨을 앗아간 제1차 세계대전의 구렁으로 떠밀었다. 미테랑보다 한 살 아래 홉스봄은 “우리 또래 교육받은 유럽인이라면 누구나 ‘6월 28일 사라예보’보다 정치적 오판(誤判)의 비극적 교훈을 세계인이 되새기도록 할 더 좋은 무대가 달리 없다는 데 동의할 것”이라 했다. ‘6월 28일’을 방문 일로 고른 미테랑의 식견(識見) 덕분에 프랑스 품격도 그만큼 높아졌다.

얼마 전 아베(安倍晋三) 일본 총리가 항공자위대 훈련기 조종석에 앉아 의기양양하게 엄지손가락을 치켜든 모습이 공개됐다. 항공기 몸체엔 아베의 얼굴보다 큰 글씨로 ‘731’이란 숫자가, 그 위엔 작은 영문 글자로 ‘지도자 아베(leader S. ABE)’라고 적혀 있었다. ‘731’이란 숫자와 마주치면 모든 한국인과 중국인, 상당수 몽골인·러시아인·일본인은 물론이고 적지 않은 미국인도 자동적으로 일본군 생체(生體) 실험부대 ‘731부대’를 떠올린다. 타민족을 실험용 쥐 다루듯 세균을 주사하고 산 채로 얼리는 실험 대상으로 삼던 부대다.

‘지도자 아베’도 뒷맛이 고약하다. 나치 두목 히틀러의 공식 호칭이 ‘지도자(F�hrer)’라는 건 상식이다. 메르켈 독일 총리보고 그런 단어가 쓰인 독일군 항공기에 타보라고 권했다면 혼비백산(魂飛魄散)하거나 당장 지휘관을 문책했을 것이다. 헌법 96조를 개정하겠다며 ’96’이란 배번(背番)을 단 유니폼을 입고 야구장에 나타나는 아베 총리다. 그가 ‘731’과 ‘지도자 아베’라고 쓰인 항공기에 무심코 올랐을까. 아우슈비츠 유대인 수용소의 생존자인 어느 이탈리아 소설가는 나치 치하의 독일이 ‘아는 사람은 말하지 않고, 모르는 사람은 질문하지 않으며, 질문받은 사람은 대답하지 않던 나라’라고 했다. 일본이 다시 그런 시대로 떠내려가는 걸까.

미테랑이 방문했던 발칸전쟁에서 교전(交戰) 상대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는 상대방의 도서관과 박물관을 집중 포격해 파괴하는 데 병적(病的)으로 집착했다. 도서관과 박물관은 승패의 갈림길과 관계없는 기억의 저장소일 뿐이다. 그런데 왜 그랬을까. 한국인이 가장 좋아한다는 작가 밀란 쿤데라는 ‘웃음과 망각의 책’에서 “상대를 말살하려면 그들의 기억을 지워 버려야 한다. 책과 역사를 파괴하고 누군가를 시켜 새 역사를 쓰게 하라. 그러면 자신의 과거와 현재를 망각하고 사라질 것”이라고 했다. 한때 유고연방이란 한 울타리 안의 두 가족이던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가 상대의 기억을 말살하는 데 그토록 매달렸던 것도 같은 이유다.

우리는 우여곡절(迂餘曲折)을 돌고 또 돌아 오늘을 산다. 우리 달력엔 성한 달이 드물다. ‘3·1’ ‘3·15’ ‘4·3’ ‘4·19’ ‘5·16’ ‘5·18’ ‘6·3’ ‘6·10’ ‘6·25”6·29’ ‘7·27’ ‘8·15’ ‘8·29′ ’10·26′ ’11·3’ ’12·12’라는 숫자에는 ‘독립과 자유를 향한 거친 숨소리’ ‘분단의 아픔’ ‘동족상잔의 피 냄새’ ‘독재의 가슴앓이’ ‘망국(亡國)의 설움’이 범벅돼 있다. 수레바퀴가 돌아갈 때마다 갇힌 사람은 풀려나고 가둔 사람이 거꾸로 갇히는 게 역사다. 우리 수레바퀴는 몇 번을 돌고 돌았다.

사람은 은혜를 물결 위에 새기고 원한은 바위에 새긴다. 극단주의는 상대의 기억에 대한 예의(禮儀)를 팽개치고 서로 상처를 후벼 파 원한을 키운다. 아무리 튼튼한 공동체도 극단주의에 발목 잡히는 순간 무너지기 시작한다. 통일은 민족 전체의 ‘기억의 공동체’를 복원(復元)하는 일이다. 모든 형태의 극단주의를 배격하면서 상대의 기억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익히는 것이 통일로 나아가는 첫걸음이다.

출처: 조선일보 2013/05/24, 링크
사진 출처: 1992년 6월 28일, 사라예보를 방문한 미테랑 대통령,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