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캠페인 100장면]나폴레옹의 국민투표 캠페인

Napoléon Bonaparte, 1769~ 1821, 프랑스 황제(1804~1814, 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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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사르가 로마 역사상 최고의 캠페인 천재라면 나폴레옹은 프랑스 역사상 최고의 캠페인 천재라 할 만하다. 카이사르가 전쟁을 통해 얻은 명성으로 시민의 지지를 얻고, 쿠테타를 통해 권력을 장악한 것처럼, 나폴레옹도 같은 방식으로 권력을 얻는다. 다른 점이 있다면 카이사르는 끝내 황제가 되지 못했지만, 나폴레옹은 스스로 황제의 지위에 오르는데 성공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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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이 유럽 정복 전쟁을 마치고 돌아온 무렵의 프랑스는 계속 되는 혼란 속에 놓여있었다. 시민혁명으로 기존의 귀족들이 밀려나면서 권력을 향한 다수의 투쟁이 한동안 지속되었다. 이 때 나타난 것이 50만 이상이 체포되고 수만 명이 처형 당한 공포정치였다. 이 기간 동안에는 굶주림 과 두려움이 사회를 지배하고 있었고 혁명 이전과 비교해 시민들의 삶은 나아지지 않았다. 나폴레옹은 이집트 원정에서 크나큰 패배를 당하였지만 여전히 국민들의 인기를 얻고 있었다. 그는 곧 대중의 인기와 군사력을 바탕으로 쿠데타를 일으켜 허약한 혁명 정부를 무너뜨린다. 이 후 거침없는 개혁정책과 하늘을 찌르는 인기에 힘입어 종신통령에 출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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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그의 천재성이 잘 드러난 것은 국민투표의 창조적 활용이다. 이전까지 국민투표는 추상적 개념이었다. 국민투표는 로마시대에 ‘국민과 상의’ 한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는데, 프랑스 혁명 때 자코뱅당이 헌법 통과를 위해 사용했었다. 나폴레옹은 여기에 살아있는 피와 살을 붙이고 영혼을 불어넣었다. 전국민의 의사를 물어 최고 통치 권력의 정당성을 확보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국민들은 환호했다. 이보다 드라마틱하고 가슴 벅찬 권력으로의 이동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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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2년 국민투표 당시 국민들이 표시해야 할 의사는 간단했다. “나폴레옹이 종신통령이 되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네” 혹은 “아니오”로만 표시하면 됐다. 다른 후보나 선거 공약은 없었다. 공개 투표였고 누가 찬성했고, 반대했는지 알 수 있었다. 결과는 찬성 360만표, 반대 8272표였다.

황제가 된 나폴레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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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의 강력한 내정 개혁 실시로 그의 인기가 나날이 높아지자 측근 인사들은 그에게 황제가 될 것을 권유하였고, 이에 나폴레옹은 이 또한 국민 투표로 결정하도록 하였다. 1804년 7월 나폴레옹이 황제가 되기 위한 국민투표가 열렸고, 찬성표 3,572,329와 반대표 2,569로 압도적인 국민들이 제정을 수락하였다. 수많이 민중들이 피를 흘리며 저항하여 왕정을 없앤지 10년 만에 그들의 손으로 왕정을 부활시키도록 만든 것이다.

대관식에서 아내 조세핀으로 황후의 관을 씌여주는 모습. 후에 나폴레옹은 ‘격’에 맞는 황후가 필요하다는 의견에 따라 조세핀과 이혼하고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마리 루이즈와 재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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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프랑스는 현재의 제도상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정치적 문제가 발생할 때 국민투표 제도를 적극 활용하였는데, 조카이자 2대 황제가 된 루이 나폴레옹도 국민투표로 황제가 되었고, 드골도 의회 개혁에 대한 국민투표를 실시하여 부결되자 대통령에서 하야한 바 있다. 노무현 대통령이 세종시 수도 이전에 대한 국민 투표를 제안한 것도 이러한 전통에서 비롯된다.

김성은

[캠페인 100장면]메디치가의 사회공헌 캠페인 Medici, 13C ~ 17C, 피렌체 최고 권력 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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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디치 가문을 상징하는 문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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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회의 CSR(Corporate Social Responsibility, 기업의 사회적 책임) 캠페인을 보면, 간혹 독특하고 참신한 아이디어도 눈에 띄지만, 대부분의 경우 보여주기 식의 형식적인 행사에 그치는 것을 많이 목격한다. 정형화된 기념사진과 상투적인 문구로 설명되는 캠페인에는 어떠한 감동이나 통찰도 들어있지 않다. 여기 사회 공헌 캠페인의 원조라 할 만한 한 가문이 있다. 이들은 집안 대대로의 사회공헌 활동을 통해 가문의 위상을 드높였을 뿐만 아니라 통치의 수단으로까지 승화시키는데 성공했다. 바로 메디치 가문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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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디치 가문의 시작이자 국부로 칭송받는 코지모 데 메디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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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디치가는 근대 초기 유럽에게 가장 돈이 많은 집안 중 하나였다. 요즘으로 치자면 전세계 재계 서열 순위 10위권 안에 드는 기업이었다. 피렌체를 기반으로 이탈리아 반도와 유럽을 넘나들며 주로 은행업과 제조업의 사업을 벌여 큰 부를 쌓았다. 현대적 복식부기 방식을 처음 도입하여 사업에 활용한 곳도 메디치이다. 한 기업이 이렇게 돈이 많아지면 사회적 영향력이 커지게 되고 이는 곧 권력으로 연결되는 법이다. 피렌체의 라이벌 가문과의 파워 게임을 거쳐 메디치도 독점적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위치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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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디치가의 통치 방식은 독특했다. ‘보이지 않게 통치하는 것’이 제 1의 룰이었다. 그들은 어떠한공직에도 오르지 않았다. 권위자가 되지 않고 피렌체의 첫번째 시민이 되겠다는 것이 내세운 이유였다. 대신 가문의 뜻에 따라 움직이는 수많은 대리인들이 있었다. 피렌체의 행정 및 사회적 문제들은 대리인을 통해 메디치가의 뜻대로 이루어 진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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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디치 일가의 사람들은 종종 그림 속에 등장하고 한다. Benozzo Gozzoli가 그린 동방박사 행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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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치의 제 2의 룰은 ‘권력의 정당성은 국가에 대한 기여로 확보한다’는 것이었다. 메디치가가 없는 피렌체의 발전은 상상할 수 없는 것이었다. 코지모 데 메디치는 인문학을 가르치기 위한 학교를 짓고 학자들을 불러모았다. 건축가들에게 성당을 비롯한 건물과 다리, 도로 등을 건설하게 했다. 막대한 금액이 드는 일이었고 오직 메디치만이 가능한 일이었다. 시민들은 코지모를 칭송하여 피렌체의 기본 인프라를 구축했다는 의미에서 ‘국가의 아버지’ 라고 불렀다. 이러한 전통은 후대의 ‘위대한 로렌초’를 비롯해 수많은 메디치 후손들에게 그대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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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박해를 피해 메디치 가문의 후원을 받은 갈릴레오 갈릴레이. 후에 보은의 뜻으로 자신이 발견한 별을 메디치에 헌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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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문화와 예술의 후원자로서의 메디치 가문의 안목은 탁월했다. 그들로 인해 이탈리아 르네상스가 꽃피울 수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가문 구성원들은 소박한 옷차림에 검소한 생활을 추구했지만, 안목은 최고급이었다. 부를 과시하기 위해 예술을 소비한 것이 아니라, 예술을 소비하기 위해 부를 축적했다. 메디치 가문은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핵심적 후원자였고 레오나르도 다빈치, 도나텔로, 보티첼리, 미켈란젤로, 부르넬레스키, 풀라 안젤리코와 같은 위대한 예술가들이 메디치 가문의 후원아래 작품을 제작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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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메디치가 인권과 자유의 가치를 존중하며 통치를 한 것은 아니었다. 정쟁과 모략의 시기였고, 필요하다면 납치, 고문, 살인은 얼마든지 용인될 수 있었다. 메디치 치하의 시민들은 다른 도시국가의 시민들과 마찬가지로 억압되고 검열된 사회에 살았다. 하지만 메디치에게는 우아한 포장지가 있었다. 사회적 헌신과 예술에 대한 사랑이라는 프레임은 메디치 가문의 권력에 대해 시민들의 자발적인 순응을 이끌어 내는 매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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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트의 국가 봉사와 재산의 기부 등은 고대 로마적 전통으로 계승되어 내려오는 것이었지만, 메디치 만큼 확고한 목표 아래 지속적이고 일관되고 사회공헌을 유지한 사례는 찾아보기 힘들다. 가문의 마지막 후손인 안나 마리아 루이사 데 메디치는 가문 소유인 우피치(Uffizi, office) 건물과 소유한 모든 예술 작품을 국가에 기증했다. 이후 메디치가의 유산은 피렌체 뿐 아니라 전세계의 유산으로 남아 있다.

김성은

[캠페인 100장면] 교황 우르바노 2세의 십자군 캠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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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pe Urbano II, 1042~ 1099. 159대 교황(재임 1088~1099)

1.
두터운 붉은 망토를 두른 노인이 천천히 일어났다. 그의 몸을 감싸고 있는 풍성한 옷감과 망토만큼이나 붉고 거대한 모자가 그의 머리 위에서 잠시 흔들렸다. 그가 연단에 서자 그 앞에 도열한 수많은 추기경들의 웅성거림이 잦아들었다. 이 늙고 앙상한 노인이 입을 열자, 대포와 같은 우렁찬 기운이 회의장 안을 감쌌다. 점점 격정에 빠지며 거의 울부짖는 듯한 노인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2.
“예루살렘, 안티오크 및 그 밖의 도시들에서 기독교도가 박해를 받고 있습니다. 불경한 투르크족은 그칠 줄을 모르고 콘스탄티노플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성지의 형제들을 구해야 합니다. 유럽의 그리스도인이여! 지위가 높건 낮건, 재산이 많건 적건, 크리스트교도의 구원에 나서야 할 때입니다. 신은 그대들을 인도하실 것입니다. 신의 정의를 위하여 싸우다 쓰러지는 자는 죄의 사함을 받을 것입니다.“

3.
1095년 클레몽에서 열린 공의회에서 이슬람에 대한 대대적인 성전을 외쳤던 이 노인은 교황 우르바노 2세이다. 우르바노 2세는 프랑스 귀족가문 출신으로 그레고리 7세 교황의 교회 개혁 운동을 열심히 도왔던 지지 세력이었고 빅토르 3세의 뒤를 이어 교황에 올랐다. 그러나 그의 명성은 대부분 역사상 가장 거대한 종교 전쟁이었던 십자군 운동을 처음 기획하고 실행한 인물이라는 점에 기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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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몽 공의회에서 설교하는 우르바노 2세

4.
1096년에 처음 시작되어 1270년대에 끝날 때까지 180년이 넘게 지속된 십자군 원정은 캠페인의 관점에서 그 규모와 지속성에 있어 유례 없는 대사건이다. 이것이 가능할 수 있었던 데에는 중세 시대의 특수성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종교적 가치가 우선시 되었던 중세에는 귀족과 성직자를 제외하고는 교육수준이 낮고 문맹율이 높았다.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이야기들, 특히 신화나 마법사, 기사와 미녀와 같은 로맨틱하고 환상적인 이야기가 유행이었다. 종교가 갖는 특유의 속성인 추상성, 관념성, 도덕성, 희생 추구가 강조되다 보니 중세인들의 사고체계도 관념적이고 감정적인 자극에 더 취약했다. 그래서 감성적으로 쉽게 선동되는 사람들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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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자 피에르를 따라 군중 십자군을 떠나려는 사람들

5.
이교도들을 몰아내고 비잔틴 제국을 건설하고자 열망했던 우르바노 2세는 파문이나, 구원이 사람들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천국의 열쇠를 가지고 있다고 여겨지는 교황이었다. 교황은 면죄부와 구원을 조건으로 내걸고 십자군 기사단을 촉구했다. 그리고 십자군 전쟁은 ‘신의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신성한 전쟁’이라고 선포하고, 전쟁에서 죽는 것 조차 죄를 구원받을 수 있는 기회라고 설득했다.

6.
물론 종교적 열정만으로 사람들을 설득한 것은 아니다. 십자군 원정에 환상을 품을 만한유효한 타깃이 있었다. 현재 상태에 만족하지 못하거나 새로운 기회를 찾는 사람들이었다. 세력 확장을 꾀하는 유럽의 제후들이 있었고, 장자상속 제도하에 상속권이 없는 귀족의 자제도 새로운 기회가 필요했다. 게다가 현재 상황에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는 하급 기사 등은 쉽게 인생에 모험을 걸어볼 만한 대상이었다. 우르바노 2세는 그들에게 외쳤다. “여러분이 살고 있는 이 땅은 사람들이 너무 많이 몰려 있기 때문에 빈궁해졌습니다. 이 땅에서 불행한 자와 가난한 자는 그 땅에서 번영할 것입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내세워 그곳에 가면 현재의 고통에서 벗어난 풍요로운 삶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메시지는 구약 성서부터 고전적으로 사람들을 매료시킨 이야기였다.

7.
그가 내뿜은 열정은 온 유럽으로 퍼졌고 각지의 제후들과 기사들이 십자군 전쟁에 참여하기 위해 몰려들었다. 급기야 종교적 신념에 사로잡힌 일군의 하급기사와 일반 민중들의 무리떼가 정식 십자군이 출발하기 전에 자발적으로 먼저 출발하여 마구잡이로 공격을 일삼는 군중 십자군 사태까지 벌어졌다. 사회적 약자들과 심리적 결핍이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헌신을 요구하고, 그 대가로 ‘영생’, ‘은총’, ‘지상낙원’과 같은 환상에 가득 차 보상을 약속하는 패턴은 1978년 존스 타운의 909명의 신도 집단 자살 사건을 비롯해 1987년의 한국의 오대양 사건, 1995년 일본의 옴진리교 독가스 살포 사건 등도 사이비 종교집단 뿐 아니라 히틀러의 나치당, 북한 김일성 정권 등 주로 독재정권의 사례에서도 흔히 볼 수 있다.

김성은

[캠페인 100장면] 아우구스투스의 카이사르 신격화 캠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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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gustus, BC63. ~ AD14. 고대 로마 초대 황제(BC27~AD14 재임)

1.

기원전 44년 3월 15일 카이사르는 갑자스레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권력을 원로원으로 되돌려놓으려 했던 공화파들은 카이사르 암살하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권력을 되찾는 데에는 실패했다. 어렵사리 내전을 끝낸 카이사르가 사라지고 나자 또다시 피의 숙청이 시작되었을 뿐이었다. 가장 유력한 차기 권력자는 로마의 전설적인 명장 안토니우스였다. 하지만 최종적으로 로마의 황제가 된 것은 그 당시 알려지지 않았던 19살의 병약한 청년 옥타비아누스, 훗날 명칭 임페라토르 율리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이다.

2. 옥타비아누스는 원래 가이우스 옥타비우스 투리누스라는 이름의 평민계급 출신 소년이었다. 혈육이 없던 카이사르에 어린 시절 입양되었고 유언장에서 카이사르의 유일한 후계자로 지목된 것이 그의 전부였다. 양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재산과 귀족 지위는 모두 큰 도움이 되었지만, 카이사르의 유산 중 가장 값진 것은 바로 ‘카이사르’라는 이름 그 자체였다. 카이사르의 진정한 후계자임을 보증하는 이 이름은 평생에 걸쳐 옥타비아누스의 가장 중요한 정치적 자산으로 기능한다. 자신의 이름으로 충분히 권력을 유지할 수 있을 때까지 ‘카이사르’는 라이벌들로부터 그를 지켜주는 갑옷이었고, 대중의 존경을 이끌어 내는 왕관과 같았다. 옥타비아누스가 장례 때 카이사르 재산의 일부를 로마 시민들에게 나눠준 것도 카이사르의 명성을 드높이며, 동시에 후계자인 자신을 홍보할 수 있는 좋은 기회로 활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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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구스투스도 동전에 자신의 얼굴과 함께 뒷면엔 ‘Divus Julius(율리우스 신)’이라고 새겨 넣었다.

3. 무엇보다 카이사르 브랜딩의 정점은 카이사르 신격화 작업이었다. 카이사르도 생전에 율리우스 가문이 비너스의 후손임을 강조하며 신성한 혈통을 자랑했었다. 자신과 비너스와의 연계를 과시하기 위해 비너스를 자신의 수호신으로 삼아 비너스 신전을 지어 바치기도 했다. 카이사르 사후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 신격화 작업에 착수한다. 카이사르가 암살된 지 2년 후 옥타비아누스의 주장에 따라 원로원은 카이사르를 신으로 추대하기로 결정하고, 이로써 ‘Divus Julius(Divine Julius, 율리우스 신)’가 탄생한다. 옥타비아누스의 이런 노력은 양아버지에 대한 추모와 존경, 그리고 법적, 사회적 의무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로 인해 자신도 ‘Divi filius(son of the divinity, 신의 아들)’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후부터 옥타비아누스는 스스로를 ‘신의 아들’이라고 칭했고 이 문구는 자신의 얼굴과 함께 동전에도 새겨 널리 알렸다. 그리고 기원전 29년 악티움 해전에서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를 물리친 후 돌아와 카이사르의 신전을 건립하고 며칠간의 축제를 벌인다. 안토니우스와의 오랜 전쟁을 끝내고 돌아와 수행한 카이사르 신전 건립과 축제는 아우구스투스가 로마 권력의 정점으로 우뚝 솟아있는 자신의 지위를 확인하는 최종 의례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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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성된 율리우스 신전의 모습(현재는 터전만 남아 있음)

4. 한편, 카이사르라는 이름 때문에 비참한 운명을 맞이해야 하는 이도 있었는데, 바로 클레오파트라와 카이사르 사이에서 태어난 카이사리온이다. 법적으로 인정받지 못했지만 살아있는 카이사르의 혈족이었으나, 또 다른 카이사르의 출현을 두려워한 아우구스투스는 살해를 명령하여 추후의 위험을 방지한다. 자신의 출세가 아버지의 이름 덕임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에, 같은 이름을 둔 형제를 살려둘 수는 없었던 것이다.

5. 아버지가 누렸던 명성을 상속받아 통치의 정당성으로 활용하는 후광효과는 선거를 통해 지도자를 선출하는 민주제 하에서도 그대로 이어진다. 근대의 루이 나폴레옹 뿐 아니라 현대의 조지 부시, 박근혜 대통령도 그러한 예이다.
김성은

[메시지는 말한다 2] 스코틀랜드 독립을 위한 단 한 번의 기회 – 스스로 미래를 선택할 수 있는 자의 권리

“스코틀랜드는 독립국가여야 하는가”
투표는 딱 이것만 묻는다.
찬성과 반대.
스코틀랜드의 새로운 내일을 결정하는 국민투표가 시작되었다.
이제 어떤 결정이 나더라도 스코틀랜드 사람들은 어제와 다른 내일을 살게 될 것이다.

중립을 지켜야 한다는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찬성 여론이 높아지자 개입했다.
“(스코틀랜드 국민들은) 신중하게 생각해야 한다.”
다급해진 캐머런 총리와 야당인 노동당도 스코틀랜드로 날아갔고, 다수의 유명인들이 가세했으며,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가 지원 사격을 하고 있다.

독립을 주도하는 스코틀랜드국민당(SNP)은 확고하고 일관된 캠페인을 유지한다.
SNP의 리더이고 스코틀랜드 자치정부 수반인 알렉스 샐먼드는 자신들의 전략을 반복한다.

잘 만들어진 독립 찬성파의 광고는 모든 것을 말한다.
“9월18일,
우리에게는
평생에 단 한 번 뿐인 기회가 있습니다.“

1.
광고가 시작되면 스코틀랜드의 미래를 상징하는 아이가 등장합니다.
“난 스스로 옷을 입을 수 있어.”
시작은 확고하고 명확하다.
미래는 아이로 상징되고 메시지는 ‘스스로 할 수 있다.’로 정의된다.
2.
캠페인의 주제어는 더 명확하다.
“YES” 캠페인.
더 붙여서 설명할 수가 없는 사안이다.

반대파들의 메시지
“No, Thanks”는 예스 캠페인에 종속된다.

3.
광고에는 과격한 구호와 깃발이 나부끼지 않는다.
독립의 비전은 보통사람들의 평범한 생활 장면을 통해 등장한다.
그들은 장밋빛 그림을 차분하게 그린다.

할아버지, 대학생, 꽃집주인, 직장 여성, 조깅하는 남성, 아이를 안고 있는 직장 여성이 차례로 등장해 독립부국의 꿈을 일상처럼 자연스레 얘기한다.

그들은 말한다.
이미 우리는 잘 사는 나라라고.
그리고 덧붙인다.
스스로가 스스로의 일을 선택할 것이라고.

“찬성표는 스코틀랜드의 미래에 대한 결정이
스코틀랜드를 위해 가장 많이 생각하는 사람들,
이곳에 사는 사람들에 의해 내려질 것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4.
스코틀랜드로 날아간 캐머런 총리는 다급하다.
“독립은 한번 해보는 별거가 아니라 고통스런 이혼이 될 것이며, 되돌릴 수가 없다”

네거티브다.
반대 캠페인의 스텐스는 때리고 부수지는 않지만 그래도 협박과 공포다.

샐먼드는 흔들리지 않고 의연하다.
딱 한 번 주어진, 단 한 번의 선택을 강조하고 반복한다.
전략과 캠페인은 메시지는 포지티브다. 태도와 자세는 간절하지만 담백하다.

2014년 올해는 스코틀랜드 독립 전쟁의 상징인 배넉번 전투로부터 700년이 되는 해이다.

5.
광고의 묘미는 여기에 있다.

스코틀랜드 독립의 가장 든든한 배경이라 할 북해 유전을 활용한다.
세계에서 가장 큰 풍력, 해양에너지 자원을 언급하며 북해유전과 가스라는 보너스로 규정한다.
그저 보너스이고, 이미 스코틀랜드는 그 이전부터 자원부국이고 잘 사는 나라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스코틀랜드 주민에게 강력한 메시지를 던진다.
이전의 스코틀랜드와 보너스를 합치면 영국을 앞서는 세계 20위권 안의 부국이 될 것이라고.

스코틀랜드는 독립 이전에도 이미,
이후에는 더,
희망의 근거가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6.
자치권을 확대해 주겠지만, 반대의 물결은 긍정의 포지션이 없다.
반대의 이름으로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했다.
불안을 조장하는 것이 핵심 전략이다.
그들은 새로운 미래를 포티지브하게 그리는 것은 하지 않는다. 불가피하다.

이제 여론조사는 반대표가 앞선 결과를 보여주고 있다.

경제학과 중세사를 전공한 샐맨드가 스코틀랜드에서 처음 의원으로 당선되었을 때 사람들은 말했다.
그가 최초의 스코틀랜드 총리가 될 사람이라고.

결과는 알 수 없다.
부인할 수 없는 한 가지는
세계는 2014년 9월18일 스코틀랜드를 정확하게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스코틀랜드라는 정체성은 오늘 독립한다.

광고의 제목은 “YES Means …”다.
그들은 ‘찬성의 자격’을 내놓았다.

영국을 반대해서 스코틀랜드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 미래를 선택할 수 있는 자의 캠페인이다.

박지윤, 유민영

출처: 2014 스코틀랜드 독립 국민투표 찬성을 위한 공식 캠페인, Yes Scotland 공식 유튜브 채널, http://www.youtube.com/watch?v=bbWnBX6BY5A

[커뮤니케이션 단신] 브랜드 콘텐츠 마케팅의 진화, 인터랙티브 영상 – 인피니티 데자뷰 프로모션

1. 남녀 두 사람이 길 한복판에 있는 자동차에서 깨어난다. 그들은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들은 어딘가로부터 도망쳐야 하는 상황이며 아직 완벽하게 자유롭지 않다. 알 수 없는 누군가가 그들을 쫓고 있다. 그들이 기댈 수 있는 것은 바로 당신. 당신에게 전화를 걸어 지금 어떻게 해야 할지 묻는다. 인피니티의 Q50의 데자뷰(deja-view) 캠페인의 인트로 영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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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닛산 자동차의 인피니티가 Q50에 대한 프로모션으로 데자뷰 캠페인을 10월 22일부터 시작했다. 데자뷰 웹사이트(infinitiusa.com/deja-view)는 음성 인식 기술을 통해 보는 사람들이 동영상 속 주인공과 인터랙션할 수 있게 제작됐다. 데자뷰 영상은 877-777-3785(수신자 부담 번호)로 전화를 걸어 다섯 자리의 싱크 코드를 전달받아 홈페이지에 입력하고 난 뒤에야 시작할 수 있다. 이야기가 진행되며 실제로 보는 사람에게 전화가 걸려오고 영화 속 주인공들에게 어떻게 해야 할지 충고하거나 주인공의 질문에 대답할 수 있다. 이러한 선택에 따라 이야기는 150가지의 다른 상황으로 변주되며, 총 15~20분 정도로 이어진다. 걸려온 전화를 받지 않으면 이야기는 그 자리에서 끝난다. 이 프로모션은 미국의 전화번호가 필요하기 때문에 미국 내에서만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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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데자뷰 캠페인의 예산은 약 2백만 달러(약 22억원)이며, 뉴욕의 메디슨 애비뉴에서 굉장히 인기있는 트렌드인 브랜드 콘텐츠 마케팅 방식을 따른 것이다. 브랜드 콘텐츠 마케팅의 목표는 소비자들이 싫어하거나 그냥 지나치는 제품 광고를 정보제공이나 즐길 수 있는 방식으로 전환하기 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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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인피니티 마케팅 총괄 키스 클레어(Keith St. Clair)는 “데자뷰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독특하고 즐거운 방식으로 인피니티 자동차를 기억하게 만드는 것이 목표다. 브랜드는 스토리 안에서 통합되지만 너무 노골적이거나 공격적인 방식으로 드러나지는 않는다. 브랜드 콘텐츠 마케팅은 애드버토리얼(기사 형태 광고)이 아니라 무언가 다른 것처럼 가면을 쓰는 것이고, 소비자들은 결국 그걸 깨닫게 된다”고 말한다. 인피니티 USA는 데자뷰 영상에 40만 명 이상이 참여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송혜원

출처: 데자뷰 홈페이지 링크, 뉴욕타임즈 링크

[정치 캠페인 3] ‘모던 패밀리’ 스타일 캠페인을 보여주다 – 뉴욕시장 민주당 후보 드 블라시오의 선거 캠페인

* 주: 미국 ABC 방송국의 인기 드라마, ‘모던 패밀리 (Modern Family)’ 를 보신 분들이 적지 않으시리라 생각한다.  인종, 국적, 나이, 동성애 문제에 이르기까지 언뜻 ‘금기시’ 되는 사안들에 대해서, 이 모든 사안을 다 끌어안고 살아가는 한 대가족을 통해 가감없이 그리고 유쾌하게 시청자들에게 메시지를 전달한다. “우리는 모두 똑같은 사람들이고 함께 살아가는 가족입니다” 라고.  그리고 9월 10일로 다가온 뉴욕시장 예비선거(Primary) 를 앞두고 판세가 요동 치고 있다.

지난 5월, 뉴욕시장 선거 경쟁구도의 양강체제인 퀸(Quinn)과 위너(Weiner)의 경쟁구도에 대해 소개한 바 있다. 퀸이 동성애자라는 사실과 위너의 과거 섹스 스캔들로 인해 성(Sex)이 주요 이슈가 되어 선거를 이끌고 나갔다. 그러나 상황이 달라졌다. 빌 드 블라시오(Bill de Blasio)의 약진이 주목 받고 있다. 그는 자신의 흑인 부인과 흑백 혼혈 자녀들을 전면에 내세운 ‘모던 패밀리 전략’으로 선거를 이끌고 있다. 지난 화요일(8월 13일) 뉴욕타임즈와 허핑턴 포스트에 따르면 퀴니피악 대학에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블라시오는 예상을 뒤엎고 4위에서 1위로 급상승하며 판세를 뒤집어 놓았다. 가족들을 연설장과 TV 광고 전면에 내세우고, 그들로 하여금 인종과 교육 문제에 대해 말하게 함으로써 신뢰를 얻고 있다. 또 블라시오 자신의 연설에서도 최대한 가족의 이야기를 엮어 메시지를 전달함으로써, 따뜻하고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동시에 현실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 8월 7일자 뉴욕타임즈에 소개된 ‘드 블라시오의 “모던 패밀리” 선거 캠페인’ 기사 전문번역을 소개한다.

De Blasio Takes His Modern Family on the Campaign Trail (드 블라시오의 “모던 패밀리” 선거 캠페인)

모던팸

며칠 전 블라시오는 (뉴욕시의) 웨스트 사이드 고속도로가 밀려 선거운동 장소에 30분 늦게 되었다. 그 곳에서 연설을 해야 했던 블라시오는 간단한 해결책을 내놓았다. 바로 부인이 대신 연설하는 것이었다. 5분 동안 블라시오와 그의 대변인, 그리고 아내 살린 맥크레이는 연설에 활용해야 할 주요 포인트를 교환하면서 심기가 편치않은 브루클린의 병원 노동자를 대상으로 하는 연설을 준비했다. 작은 부분일지 몰라도, 여러 집회나 지하철 유세에서 있어 가족들을 선거 전단, 토론 준비의 주역으로 내세우는 것은 그 후보자에 대해 많은 것을 말해준다. 현재 블라시오는 이러한 전략을 자신의 15살 아들, 단테가 나레이션하게 될 TV광고로 확대하고 있다.

9월 10일 예비선거를 앞두고 가족 중심의 선거 전략은 더욱 강화될 것으로 예상된다. 이 전략은 후보자의 인간적 면모를 보여주는 동시에, 잘 알려지지 않은 자신을 효과적으로 부각시킬 수 있는 방법이다. 경쟁자들은 개인적 삶을 정치적으로 활용하는 것이 오히려 잠재적 지지자들을 잃게 하는 건 아닌지 고민하고 있는 반면, 블라시오는 부인과 자녀들 각자가 원하는 시간만큼 선거에 참여시키고 있다. 그리고 가족 중심의 활동에 의문을 갖는 이들에게 다음과 같이 일축한다.

“이것은 우리의 삶이다. 우리는 가족으로서 우리의 삶과 가치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It’s our lives. We are portraying our lives, our values as a family.”)

백인 투표 인구가 점점 소수자가 되고 있는 뉴욕시에서, 가족 중심의 전략은 이탈리아계 미국인 블라시오가 현대 중산층 다문화의 전형으로써의 지위를 그릴 수 있도록 해주었다. (블라시오의 부인 맥크레이는 흑인이며 두 사람에게는 단테와 18세인 키아라 두 명의 자녀가 있다.) 블라시오의 보좌진은 이러한 전술이 교육 이슈에 신뢰성을 강화해 주었고(그의 자녀들은 현재 공립학교를 다니고 있다), 섹스 스캔들로 얼룩진 캠페인에서 그를 도덕적이고, 가족적인 사람으로 보이게 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또한 이는 자녀를 사립학교에 보내는 부유한 백인 이혼 가장인 마이클 R. 블룸버그 시장과의 극명한 차이를 강화하고 있다고 블라시오 보좌진은 말했다.

앞에서 언급한 새로운 광고의 가장 중요한 포인트에서도 블라시오의 아들은 젊은 흑인 남성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미치고 있는 블름버그 시장의 경찰 불시검문 정책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카메라를 바라보며 단테는 자신의 아버지만이 “유색인종을 불공정하게 타깃으로 삼는 불시검문의 시대를 종결한 유일한 사람”이라고 약속한다.

민주당, 공화당 할 것 없이 블라시오의 경쟁자 중 어느 누구도 자신의 자녀들과 일상적으로 캠페인을 하지 않는다. 단지 몇몇 보여주기 위한 이벤트에만 배우자를 등장 시킨다. 민주당내에서 윌리엄 C. 톰슨 주니어 전 감사관은 그의 아내의 캠페인 일정을 짜기 시작했다. 앤서니 D. 위너의 아내 휴마 아베딘은 그의 남편의 부적절한 온라인 스캔들에 대한 기자회견에서 남편의 곁에 서있을 때 불편하게 카메오 역할을 수행 했지만, 그 이후로 점점 등장하지 않고 있다. 크리스틴 C. 퀸의 아내 김 카투로는 가끔 행사에 나타나지만, 알려지길 꺼려한다. 이와 대조적으로, 블라시오의 가족은 늘 그와 함께한다. 이런 아침 시민들과 악수하는 시간부터 늦은 시간까지 이어지는 시민회관 연설까지 함께 한다. 특히 그의 부인은 사람들이 왔는지 안 왔는지 찾아다니는 상징적 존재가 되었다.

첼시의 어떤 슈퍼마켓 앞에서는 휠체어를 탄 노파는 흥분하며 그녀에게 다가가 TV에서 보았다며 “사람들을 만나러 나오는 걸 보니 너무 좋다”라고 말했다. 맥크레이는 노파의 손을 잡고 “사람들 무엇을 원하고 무엇에 관해 염려하는지를 알아야 하는데, 이것이 유일한 방법이다“ 라고 대답했다. 잠시 후 그녀는 부유세를 올려 유아원에 갈 수 있는 기회를 확대하고자 하는 블라시오의 정책을 유권자에게 전달하였다. 블라시오는 길거리 연설에서 항상 그의 자녀들을 엮어서 이야기를 전달한다. 예술 교육 포럼에서 그는 가까이에 있는 단테를 가리키며, 드라마 프로그램이 어떻게 아들의 토론 기술을 키워주고, 학생으로서의 자신감을 향상시켰는지를 이야기 하였다.

인터뷰에서 블라시오는 그의 자녀들이 아주 어린 나이에 캠페인의 맛을 본 것 같다고 말했다. 키아라는 네 살 때 블라시오의 시 교육위원회 선거 팜플렛을 나눠주었다. 그리고 키아라와 단테 모두 힐러리 클린턴의 초대로 백악관에서 묵은 적이 있는데, 당시(2000년) 그녀의 상원의원 선거를 블라시오가 관리하고 있었다. 블라시오 가족은 선거 유세에 가벼움을 이끌어낸다. 지난 주 첼시에서 유세 활동을 하는 동안 블라시오는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노란색, 하얀색, 베이지색의 패턴 무늬의 옷을 입은 아내를 보고 ”살린, 나 그 옷 너무 좋아!” 라고 외치고, 그녀는 미소로 화답했다. 이후에 블라시오가 이야기하길 : “이것은 우리가 데이트하는 방법입니다. 우리는 캠페인을 함께 하지요.”

장유진, 정재훈 (캠페인 컨설턴트, 객원 필진)

* 정치 캠페인 이전 글들을 보시려면
– [정치 캠페인 1] 뉴욕시 최초의 레즈비언 시장의 탄생인가, 또는 미드 ‘굿와이프’ 가 뉴욕에서 재현될 것인가? – 민주당 후보 2명의 출마선언 동영상 살펴보기, 링크
– [정치 캠페인 2] “저는 나중에 커서 시장이 되고 싶어요” – 뉴욕타임즈 칼럼니스트 토머스 프리드먼이 관찰한 잘 나가는 미국 도시들의 혁신 리더십, 링크 

사진 포함 출처: 뉴욕타임즈, 링크